폴란드 성직자인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한 지동설은 상상을 뛰어넘는 과학적 변화를 몰고 왔다. 1872년 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가 그린 ‘신과 대화하는 코페르니쿠스’.  한경DB
폴란드 성직자인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한 지동설은 상상을 뛰어넘는 과학적 변화를 몰고 왔다. 1872년 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가 그린 ‘신과 대화하는 코페르니쿠스’. 한경DB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 겸 가톨릭 사제였는데 평생 지동설을 연구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에는 망원경이 변변찮아서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 직관적인 철학에 가까웠고 허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지동설에 도달한 과정은 칸트가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명명했듯이 근대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지구를 우주 중심에 두면 금성 화성 등의 궤도가 찌그러지고 오락가락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행성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원리에 위배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본 전제를 180도 뒤집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둔 것이었다.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으로 계산해본 결과 천동설의 모순이 명쾌하게 해소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된 합리적 의심과 논리적 사고의 연장선이다. 그 단초가 된 추론법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14세기 영국 논리학자인 윌리엄 오컴이 신학 논쟁에서 펼친 논리 전개 방식에서 유래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이 최선에 가깝다는 의미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것이 최선’이라는 점에서 ‘사고 절약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보다 직선으로 가는 게 빠른 것처럼, 인류가 오랜 기간 축적한 경험 법칙을 논리 철학에 적용한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과학자의 기본 사고방식으로 각인되어 근대 과학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등 영국 경험론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지동설은 합리성, 객관성, 현실성 등 과학적 사고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근대로 넘어가는 출발점은 종교개혁 아닌 과학혁명허버트 버터필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근대과학의 기원》에서 16~17세기 과학 발전을 18~19세기 산업혁명에 빗대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했다. 유럽이 근대로 진입한 결정적 요인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이 아니라 과학혁명이라는 게 버터필드의 요지였다. 패러다임 개념을 주창한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상과학’이 더 이상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과학의 위기’가 발생하며 새로운 표준이나 모형이 정상과학이 되어 기존 정상과학을 대체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사이에 숱한 과학적 단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은 대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부터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까지로 본다. 그 사이에 케플러, 갈릴레이, 로버트 보일 등이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이름을 남겼다. 그 이후에도 많은 발견이 이어졌지만 이 150년간의 변화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16~17세기에는 과학혁명이 일어날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배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첫째, 1440년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이다. 제지기술에 인쇄술이 더해져 지식의 축적과 전파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세에 수도사들이 귀하고 비싼 양피지에 일일이 손으로 필사했던 것과 견주어 보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 덕에 과학 연구와 기술이 개인 영역을 넘어 빠르게 확산되었다. 둘째, 14~15세기 르네상스시대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술가와 기술자들의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중세를 거치며 1000년간 잠자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다양한 저작이 발굴되고, 전파되면서 교회에서 전해들은 것과는 판이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셋째,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광범위한 과학적 수요가 생겨났다.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면 나침반뿐만 아니라 더 정밀한 천문학과 수학적 지식이 필수였다. 또한 신대륙 발견 이후 ‘콜럼버스의 교환’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동식물과 질병 등에 대한 연구도 필요했다. 이 같은 수요는 중세의 과학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근대철학이 뒷받침한 과학혁명과학혁명의 또 다른 배경으로는 같은 시기에 형성된 근대철학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경험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참다운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편견을 네 가지 우상으로 제시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인데 이 우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실험과 귀납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이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프랑스의 합리주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가설과 연역법을 제시했다. 그는 명징성을 확보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인 의심을 거쳐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연역법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접근법은 18세기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계몽주의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합리적·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과학혁명은 프랑스혁명처럼 특정일을 기점으로 일어나거나 일상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처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점진적인 변화였다. 놀라운 발견이 하나하나 축적되면서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잉태하고, 사람들의 생각까지 바꿨다. 과학혁명이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① 과학혁명도 산업혁명처럼 이윤의 창조라는 목적에서 진행된 것일까, 아니면 진리 탐구라는 지적 호기심 때문에 진행된 것일까.

②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뉴턴까지 단절이 있었다는 주장과 아랍 등 이슬람권이 그리스 과학을 계승하고 수학과 화학을 더 발전시켜 서구에 전달했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③ 화약 나침반 종이 인쇄술 등 앞선 과학기술을 갖고 있던 중국 등 아시아가 과학혁명이나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서양에 뒤처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