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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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길잡이 기타
함수는 세상의 관계·변화 이해하는 도구 [재미있는 수학]
중학교에서 처음 배우는 함수는 보통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말합니다. “ 에 어떤 수를 넣으면, 그에 따라 값이 하나로 정해지는 관계를 함수라고 합니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죠. “아, 함수는 식이구나.”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사실 고대 사람들도 함수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날짜에 따라 달라지는 별의 위치를 표로 정리했습니다. 날짜를 넣으면 위칫값이 하나 나옵니다. 입력을 하면, 결과가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함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함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상태였습니다.17세기, 데카르트는 좌표평면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곡선이 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죠. 직선은 원은 과 같은 식들입니다. 그리고 18세기, 오일러는 라는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함수는 점점 사람들에게 ‘식’으로 인식되게 됩니다.그런데 여기서 현대의 함수가 가지는 중요한 약속을 하나 들여다봐야 합니다. 바로 하나에 하나가 나온다는 점이죠. 왜 꼭 하나여야 할까요?예를 들어 을 넣었더니 가 7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10이기도 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3을 넣으면 도대체 뭐가 나오는 거지?”함수를 자판기처럼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동전 하나를 넣으면 음료 하나가 나옵니다. 그런데 동전 하나를 넣었더니 콜라도 나오고 사이다도 동시에 튀어나온다면? 이게 유용할까요?그 기계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수학은 예측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같은 입력에서 결과가 항상 같아야 계산도 할 수 있고, 그래프도 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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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도 경제원리가 작용할까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 겸 가톨릭 사제였는데 평생 지동설을 연구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에는 망원경이 변변찮아서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 직관적인 철학에 가까웠고 허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지동설에 도달한 과정은 칸트가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명명했듯이 근대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지구를 우주 중심에 두면 금성 화성 등의 궤도가 찌그러지고 오락가락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행성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원리에 위배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본 전제를 180도 뒤집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둔 것이었다.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으로 계산해본 결과 천동설의 모순이 명쾌하게 해소되었다.‘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된 합리적 의심과 논리적 사고의 연장선이다. 그 단초가 된 추론법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14세기 영국 논리학자인 윌리엄 오컴이 신학 논쟁에서 펼친 논리 전개 방식에서 유래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이 최선에 가깝다는 의미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것이 최선’이라는 점에서 ‘사고 절약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보다 직선으로 가는 게 빠른 것처럼, 인류가 오랜 기간 축적한 경험 법칙을 논리 철학에 적용한 것이다.오컴의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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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왜 사물을 의인화하는 걸까?…데카르트주의자는 될 수 없으니까
겨울산에 가면밑둥만 남은 채 눈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내면드러난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들여다볼수록비범하게 생긴 넓은 이마와도타운 귀, 그 위로 오르는 외길이 보인다그새 쌓인 눈을 다시 쓸어내리면거무스레 습기에 지친 손등이 있고신열에 들뜬 입술 위로물처럼 맑아진 눈물이 흐른다잘릴 때 쏟은 톱밥가루는 지금도마른 껍질 속에 흩어져해산한 여인의 땀으로 맺혀 빛나고,그 옆으로는 아직 나이테도 생기지 않은꺾으면 문드러질 만큼 어린것들이뿌리박힌 곳에서 자라고 있다도끼로 찍히고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나이테가 있다.- 나희덕, 「겨울산에 가면」-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 이마와/도타운 귀…/… 손등…/신열에 들뜬 입술 …/… 눈물…/해산한 여인의 땀…/ 어머니사물에도 영혼, 정신, 의식, 마음이 있을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데카르트주의자이다. 시인은 아무래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여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만 가슴 속에 있는 마음이 움직일 테니까….데카르트주의자에게 ‘나는 나이테를 본다’는 가능해도, ‘나이테가 나를 본다’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정신, 의식을 지닌 존재, 즉 주체이고, 그 외의 것들은 정신, 의식이 없어 객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 ‘나이테가 나를 본다’는 것은 주체인 ‘나’를 객체로, 객체인 ‘나이테’를 주체로 놓은 주객전도의 표현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나이테라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