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이야기
보이는 경제 세계사 (26) 금융으로 돈을 번 메디치 가문
중세에 위축됐던 예술과 문화에 대한 후원은 14~15세기에 되살아나며 르네상스를 열었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생·부활’을 뜻한다. 르네상스가 번성한 그 중심에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께만 해도 두드러진 집안이 아니었다. 가문의 창시자 격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삼촌인 비에리 메디치가 교황청 환전 업무를 하던 메디치은행을 인수했다. 그리고 2년 뒤 상업이 번성한 피렌체로 옮겨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은행이 70개가 넘었다. 이때 은행은 지금처럼 거대 금융회사가 아니라 대부업자를 가리켰다. 조반니는 나폴리 귀족과 8년간 거래했는데, 이 귀족이 추기경을 거쳐 1410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가 됐다. 요한 23세는 메디치은행에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주거래은행의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메디치은행은 16개 도시에 지점을 둔 최대 은행으로 부상했다. 모험대차로 ‘피렌체의 국부’ 칭호 얻어1415년 요한 23세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폐위돼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조반니는 떼일 각오를 하고 그에게 벌금 낼 돈을 빌려주었다. 이 대출은 고스란히 손해가 됐지만, 조반니는 고객과의 신뢰를 끝까지 지킨 금융업자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덕에 후임 교황도 교황청 자금을 다시 메디치은행에 맡겼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과정과 비슷하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신뢰와 신용을 지킨 것이 성공의 요체인 셈이다.보이는 경제 세계사 (26) 금융으로 돈을 번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이 급성장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피렌체 권력자들과의 마찰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 자금 거래가 끊기며 위기를 맞았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한 뒤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가 가업을 물려받았다. 권력의 생리를 간파한 코시모는 다른 금융업자들과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 당시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광산, 제조, 보험업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은 해상무역이 활발해 보험 수요가 많았다. 코시모는 배로 운송할 화물을 싸게 산 뒤 배가 들어오면 회수하는 거래(모험대차)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압도적인 부자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였을까? 알비치 등 피렌체의 유력 가문들이 결탁해 코시모를 베네치아로 추방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통치자에 오른 알비치는 실정으로 퇴출됐으며, 코시모는 시민들의 환영 속에 귀환했다. 코시모는 1435년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됐다. 그는 사업가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의 국부’라는 칭호도 얻었다. 근대 기업가의 롤모델…노블레스 오블리주 보여주다금융업자인 코시모가 통치자에까지 오른 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피렌체에 두루 기여했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예술가·건축가·철학자·과학자 등을 후원했고, 교회·공공건물 건립에도 큰돈을 댔다. 19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코시모라는 이름은 르네상스와 동의어나 다름없다”고 평했다.
그의 아들 피에로는 일찍 사망했지만,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23년간 이끌었다. 로렌초는 나폴리왕국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나폴리 주재 대사를 자원해 평화협정을 이끌어 냈을 만큼 담대하고, 외교 수완이 뛰어났다. 또한 인문학적 교양으로 예술 후원에 앞장서 ‘위대한 자’라는 뜻의 ‘일 마그니피코’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가 통치한 23년은 곧 피렌체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영국 장미전쟁(1455~1485) 때 메디치은행 런던 지점이 잘못된 투자로 파산했고, 다른 지점들도 속속 문을 닫으며 몰락했다. 이는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해양 패권이 대서양으로 넘어가 지중해의 이탈리아 자유도시들이 점차 쇠퇴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메디치 가문은 금융으로 번 돈으로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웠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거장들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에 생계 걱정을 덜고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유럽 각지의 희귀 도서와 고문서를 모아 메디치 도서관을 세웠다. 이 도서관은 유럽 최초의 공공 도서관이었다. 피렌체대성당, 메디치 리카르디궁, 우피치미술관 등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이 남긴 족적이 가득하다.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은 화가, 조각가뿐 아니라 철학자, 시인, 건축가, 과학자 등 유럽 각지의 거장들을 피렌체로 끌어 모았다. 인접한 공간에 수많은 천재가 모여 수평적 유대를 형성할 때 1+1+1은 3이 아니라 100이나 1000이 될 수 있다. 미국 컨설턴트 프란스 조헨슨은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이 한곳에서 만나는 교차점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메디치 효과’라고 명명했다.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시대의 피렌체를 혁신과 창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듯이 다양한 영역이 융합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은 장사꾼과는 차원이 다른 기업가의 롤모델이었다. 단순이 돈을 버는 데 급급하지 않고 다방면에서 사회 공헌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가문 구성원들이 스스로 지식과 교양을 쌓고 예술을 통해 이미지 개선과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공식도 만들어 냈다. 메디치 가문은 기업가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① 은행과 보험 등 금융업의 발전이 제조업이나 무역업 못지않게 중시되는 이유는 왜일까.
② 프랑스 루이 14세의 오페라 및 궁중문화 지원,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발레 및 미술 육성, 조선 세종의 한글 창제와 출판 장려 등 주요 통치자들이 문화에 대해 후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③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얽매이지 않고 부를 축적한 상인이 지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했다면 조선 시대 등 우리의 근세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