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쟁력 있는' 말을 찾아야 한다. 의미전달이 잘되고
발음하기 좋은 말이면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다듬기보다 적게 하더라도
확실한 말을 찾아 제시해야 한다. '에어캡'을 '뽁뽁이'로 바꾼 게 그런 사례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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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선 외래어 남용의 기준을 ‘좋은 우리말 표현이 있는데도 굳이 외래어를 쓴 경우’로 설정했다. 해방 이후 우리말 다듬기의 상당 부분은 이 ‘우리말 대체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작업은 우리말 살리기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지나치게 명분과 당위에 매몰돼다 보니 때로 현실과 동떨어진 ‘낯선 말’을 내놓아 비판도 많이 받았다. 어설픈 순화어…의미전달 안 되고 표현도 어색일제 강점기 혹독한 우리말 말살정책을 이겨낸 우리 민족이 광복 뒤 우리말 되살리기 운동을 펼친 것은 필연적이었다. 구체적으론 한자와 일본어 잔재의 추방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당시 한자파와 한글파 간 갈등은 험악했다. “한글파에서는 비행기를 ‘날틀’로,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배꽃계집애오로지배움터’로 하자고 한다더라”는 흑색선전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그릇된 순화어의 예로 흔히 거론되는 ‘날틀’과 ‘배꽃계집…’이 잘못 알려진 데는 사연이 있었다.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이끌던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3년)에서 “우리는 ‘날틀’ 같은 것을 주장한 일도 없거니와 그것은 너무도 졸렬한 새말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부러 되잖은 번역을 함으로써, 한자말을 우리말로 옮기려는 운동을 우스운 장난처럼 만들어 이를 조롱하고 방해하려는 태도”라고 분개했다. 한글파의 주장은 學校나 飛行機 식으로 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로 학교, 비행기라고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자파는 이를 이용해 한자말을 억지 토박이말화하려 한다고 왜곡해 선전했다.

물론 빌미가 있었다. 최현배 선생은 “우리는 일반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화(梨花)’를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새로 학교 이름을 정한다면, 이화보다는 ‘배꽃’이 훨씬 배달스러워 좋을 것이다. 여자(女子)는 ‘계집아이’라 한다고 무엇이 나쁠 것인가”라고 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말 되살리기가 필요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시간 걸려도 익숙하고 쉬운 우리말 찾아야장면을 훌쩍 건너뛰어 몇 해 전으로 와보자. “이미 사전에 실려있는 ‘웹툰’이나 ‘스마트폰’을 굳이 ‘누리터쪽그림’이나 ‘똑똑전화’로 바꾸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한글날을 앞두고 순화어 실태를 공개했다. 2004년 이후 국립국어원에서 다듬은 말 457개의 목록이었다. 이 자료에는 대부분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순화어들이 담겨 있었다.

‘비트박스→입소리손장단, 퀵서비스→늘찬배달, 파파라치→몰래제보꾼, 글램핑→귀족야영, 키덜트→어른왕자’ 같은 게 대표적이다. 블루투스는 ‘쌈지무선망’으로 다듬었다가 문화체육관광부 심의를 거쳐 다시 ‘블루투스’로 돌아간 예다. 우리말 다듬기의 역사가 반세기를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이런 ‘어색한’ 대체어가 제시되고 있었다. 이 의원은 “낯선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공감을 바탕으로 순화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쟁력 있는’ 말을 찾아야 한다. 의미전달이 잘되고 발음하기 좋은 말이면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다듬기보다 적게 하더라도 확실한 말을 찾아 제시해야 한다. ‘에어캡’을 ‘뽁뽁이’로 바꾼 게 그런 사례다. 밸류체인→가치사슬, 니치마켓→틈새시장, 로스리더→미끼상품 등도 성공적인 순화 사례다. 의미도 잘 살리고 친숙한 말을 써서 어색하지 않다. 이런 말은 언중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요즘 우리말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점도 좋은 ‘환경적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