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 기자의 키워드 시사경제 - 유동성 함정

자금 공급 늘려도 투자·소비 늘지 않고
경제주체의 화폐 보유만 증가하는 현상
정부가 노린 '경기부양 효과' 안 먹혀

국내 통화유통속도·통화승수 등
코로나 사태 이후 역대 최저치로 하락
시중에 풀린 돈은 주식·부동산에 쏠려
서울 황학동 주방가구거리에서 상인들이 폐업 식당에서 사들인 집기들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한경DB
서울 황학동 주방가구거리에서 상인들이 폐업 식당에서 사들인 집기들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한경DB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런 안내문 한 장을 남기고 조용히 폐업하는 가게가 줄을 잇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비임금 근로자(자영업자+무급가족 종사자)는 663만9000명으로, 1년 새 16만1000명 감소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매출이 예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고용한 직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전년 대비 17만2000명 줄었고, 직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6만6000명 늘었다. 정동욱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사업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을 쓰지 않고 자동주문 시스템을 활용하는 흐름이 코로나 영향으로 더욱 가속화됐다”고 했다. 넘쳐나는 유동성, 어디로 갔나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 풀기’에 나섰지만 실물경제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가계가 소비를 늘리고,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는 데 쓰이게 하자는 본래 취지와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은 활황을 누리는데 실물경제는 침체에 빠지는 괴리 현상도 감지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경제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동성(liquidity)이란 단어는 ‘돈’으로 바꾸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래 경제학에서 유동성은 자산이 얼마나 쉽게 교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뜻한다. 현금은 그 자체가 교환의 매개여서 유동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유동성=현금’의 맥락으로 자주 쓰인다. 증시에선 시중자금 유입이 주가 상승을 이끌 때 ‘유동성 장세’라고 부른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면서 기업 실적과 무관하게 주가를 끌어올리는 현상이다.

유동성 함정이란 자금 공급을 확대해도 투자와 소비가 늘지 않고, 사람들의 화폐 보유만 늘어나는 것을 말한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20년대 대공황 때 통화량이 늘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제기한 학설이다. 일반적으로 시중에 돈을 많이 풀면 경기부양 효과를 내는 게 정상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경기 전망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가계·기업이 돈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통화량 급증했는데, 유통속도 사상 최저시중의 유동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면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광의통화량(M2)’ 통계를 보면 된다. M2는 현금과 예금에다 비교적 현금화가 수월한 금융상품까지 모두 합친 것이다. 지난 9월 M2는 3115조원으로,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월(2954조원)보다 161조원 늘었다.

풀린 돈이 얼마나 잘 돌고 있는지는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지표는 올 들어 사상 최저 기록을 쓰고 있다. 통화승수는 M2를 본원통화(중앙은행에서 풀려나간 1차 화폐 공급량)로 나눈 값이다. 2018년 말과 2019년 말 모두 15.6배였던 통화승수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15배 밑으로 내려갔다. 지난 9월 국내 통화승수는 14.45배. 한은이 1원을 찍어내면 시중 통화량은 14원45전 늘어나는 데 그쳤다는 의미다. 통화유통속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M2로 나눈 값으로, 화폐 한 단위가 얼만큼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는지를 보여준다. 국내 통화유통속도는 2018년 4분기 0.71, 2019년 4분기 0.68, 올 2분기 0.63으로 떨어졌다.

넘쳐나는 유동성은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영끌 대출’(영혼까지 끌어모아 받은 대출)과 ‘빚투’(빚 내서 투자)로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는 사람이 늘어난 근본적 원인은 초저금리 환경과 풍부한 유동성에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유동성 함정 현상은 자칫 과거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진입하는 신호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쓸쓸한 ‘폐업 안내문’을 붙이고 떠나는 자영업자가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