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2) 신라의 해륙정책

낙동강·한강 내륙 수로망도 확보하며 기선 잡아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 죽령을 바라보는 남한강가 산꼭대기에 있다. 고구려계로 알려졌으나 발굴 결과 신라 양식으로 밝혀졌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 죽령을 바라보는 남한강가 산꼭대기에 있다. 고구려계로 알려졌으나 발굴 결과 신라 양식으로 밝혀졌다.
한민족의 근대 이후 100여 년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다. 35년의 긴 식민지 생활을 자초했고,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자기파멸을 시도하면서 죽음과 폐허, 가난을 남겼다. 그런데 또 50여 년 만에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12년에 영토 확장 신호탄서기 500년, 지증 마립간이 등장했다. 그는 곧 ‘으뜸 되는 간(칸)’이라는 고유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인 ‘왕’으로 고쳤고,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신라’ 등에서 ‘신라’라고 고정시켰다. 신라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즉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512년에 본격적인 영토 확장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해, ‘김이사부’라는 20대 초의 젊은 왕족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배 이물(앞머리)에 나무를 깎아 세운 사자로 위협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 해양소국을 점령했다. 그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주(自主) 획득과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동해 중부 횡단 항로를 빼앗겼고, 반대로 신라의 해양활동 범위는 확장됐다. 금관가야의 해양력 흡수이어 등장한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를 설치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고구려의 힘을 빌려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522년에는 가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527년에 조카인 젊은 ‘박이차돈’의 순교를 이용, 불교를 공인하면서 구체제와 구사상을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어 529년에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에 터를 둔 금관가야와 바다를 건너온 왜를 공격했다. 결국 532년에 이르러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세운 금관가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로써 신라는 남해안 일대의 물류망과 해양력을 흡수했으며, 일본열도와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까지 확보하면서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뒤를 이어 540년에 조카인 진흥왕이 임금이 됐다. 7세였으므로 19세까지 어머니가 섭정을 했는데, 그녀는 김이사부와 재혼한 사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이사부는 다음 해에 병부령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각간이며 상대등으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562년까지 활약한 그는 신라를 마침내 강대국의 반열에 올리고, 훗날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만든 큰 역할을 했다. 고구려 병력 북방 이동 맞춰 한강 상류 탈취6세기는 동쪽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중이었고, 중국 지역은 남쪽은 분열시대가 계속됐고, 북쪽도 북위가 멸망한 후에 또 분열돼 싸우고 있었다. 한편, 광대한 초원을 통일한 돌궐 부족은 몽골계의 유연을 멸망시키면서 552년에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들은 북중국 지역의 선비족들이 세운 국가들을 수시로 공격했고, 이런 정세는 신라의 국경지역에 진주했던 고구려 병력을 북방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신라는 548년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했다.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충남 지역을 놓고 1년 이상 전투를 벌이는 혼란을 절묘하게 이용해 이 지역을 차지했다. 나아가 551년에는 고구려가 돌궐과 랴오둥지역의 백암성 등에서 전투를 벌일 때를 이용, 한강 상류인 죽령(소백산맥) 이북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탈취했다. 1978년에 단양군 적성면의 남한강가 언덕에서 돌비가 발견됐다(단국대 정영호 교수팀). 비문에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사실과 김이사부를 비롯한 공훈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500년 이상 약소국이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 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