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4)

'입장'은 모호한 말이다.
'처지, 형편, 속셈, 의견, 태도, 생각, 주장, 반박, 설명, 방침, 반응…' 등
문맥에 따라 달리 쓸 말 10여 가지를 대체한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사진=신경훈 기자)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사진=신경훈 기자)
일자리 창출이 우리 경제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고용참사’란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이와 관련한 언론보도문 가운데 다음 같은 유형의 문장이 꽤 있다. “청와대는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큰 틀의 변화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정책수단을 수정할 여지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목해야 할 곳은 서술어로 쓰인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이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입장'을 자주 쓰면 글이 모호해져요
의미 모호하고 우리말 구조 망가뜨려

여기에 ‘입장’이 왜 들어갔을까? 이어지는 문장에서 청와대 관계자는 “소득주도성장이 근본적인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분명하게 그리 말했으니 ‘~있다고 밝혔다’라고 하면 될 일이다. 간결하고 알아보기도 쉽다. 상투적으로 ‘입장’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잘못된 글쓰기 습관 탓이다.

지난 3월 한창 ‘미투 운동’이 펼쳐질 때도 이런 오류가 많았다. 이런 것을 보면 ‘입장’은 어딘지 찜찜한 상황에서, 말하기 곤혹스러운 처지를 드러낼 때 자주 쓰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입장’은 대표적인 일본어 투다. 그러나 딱히 외래어 투라고 해서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이 말의 문제점은 두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말에 대한 폐해다. 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장’은 우리말 문장을 왜곡한다.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쓰는 게 가장 좋은 글쓰기 방법이다. 그런데 굳이 ‘입장’을 넣어 말을 비틀어 쓴다. 우리말 구조를 망가뜨리는 일이다.

또 하나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막는다는 점이다. ‘입장’은 모호한 말이다. ‘처지, 형편, 속셈, 의견, 태도, 생각, 주장, 반박, 설명, 방침, 반응…’ 등 문맥에 따라 달리 쓸 말 10여 가지를 대체한다. 막강한 위력이다. 에둘러 슬쩍 비껴갈 때,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분명히 밝히기 곤란할 때 상습적으로 등장한다.

구체적이고 명료해야 좋은 글쓰기

이 말이 좋게 말해 ‘정치적 언사’에 많이 나오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공급자 중심의, 무성의한 표현일 뿐이다.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 자칫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낳기 십상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이상한 말투가 너무나 많다. “마을에 소각장이 들어서는 방안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불편한 입장을 보였다.” 주민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거나 ‘불만을 드러냈다’ 등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곤혹스러워했다’고 하면 그만인데 이를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로, ‘부담스러워했다’고 하면 되는데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식으로 쓴다. “도로공사는 기름값 인하로 많은 국민이 혜택을 보는 만큼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도 ‘~문제될 게 없다고 설명했다(주장했다/말했다)’고 하면 깔끔하다. 이를 두루뭉술하게 ‘입장’이란 말로 넘어가니 어색하고 모호한 문장이 된다.

이제 우리말 위상도 꽤 높아졌다. 국민의 국어 인식도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입장’의 남용을 두고 새삼 외래어 순화 주장을 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다. 자칫 ‘우리말 세계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의 건강성’에 있다. 다양하고 풍성한 어휘, 거기서 우러나는 국어의 깊은 말맛을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 이는 글을 비틀지 않고 바로 씀으로써 실현된다. 자연스러운 우리말법을 쓰는 데서 세련된 맛도 살아난다. 그것이 곧 글을 힘 있게 쓰는 길이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