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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716호 2021년 7월 19일

경제사 이야기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민주주의 꽃 피웠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장 큰 ‘공업’ 생산 시설은 방패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이 시설은 물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볼 때 대규모라고 하긴 힘들다. 하지만 이곳에선 무려 120명의 노예가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플라톤의 《국가》에도 잠시 등장하는 시라쿠사 출신 케팔로스의 소유였다. 이 같은 대규모 노예경제 시설이 아주 이례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유명한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가 소유권 분쟁을 벌였던 부친의 재산에는 칼을 만드는 32명의 전문 노예 도공과 침대를 제작하는 20명의 소목수가 포함돼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고대 세계를 ‘노예제 사회’로 정의내린 뒤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노예의 존재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시기 노예는 후대인이 생각하는 개념에 따라 칼로 자르듯 확실하게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건이나 재산처럼 인격이 완전히 상실되지도 않은 모호한 경계선상에 있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불분명한 정체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는 그리스 문명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노예제를 자양분 삼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었던 역설도 성립된다. 인류 역사상 고대 지중해 유역과 콜럼버스 이후 신세계에서 총 다섯 곳 정도 발견된다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존재인 노예제가 서구 고대문명의 핵심 지대에서 발현해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정치·군사 부문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노예가 활동
그리스에 노예제가 확산된 계기는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이전에는 대규모로 노예를 창출할 만한 큰 전쟁이 적었다. 헤로도토스가 동양의 전제주의에 맞선 아테네 민주주의의 승리로 묘사했던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에게 노예제 보급을 촉진시켰다. 기본적으로 전장의 전리품인 포로 형태로 노예가 충원됐지만 이런 방법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필요한 노예의 수를 채울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노예는 주로 노예 상인들을 통해 동방의 노예시장 같은 외부 세계에서 공급됐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트라케의 부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주저 없이 자신의 자식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용도에 따라 노예 공급원이 달랐다. 미숙련 노동력은 북방의 트라케나 프뤼기아에서 주로 공급됐고, 좀 더 숙련된 노동력은 시리아와 동방에서 사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충원된 노예는 자유 시민의 고유한 활동 분야인 정치·군사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배치됐다. 아테네 전성기에 노예 인구는 앤터니 앤드루스에 따르면 약 8만~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성년 시민 한 명당 노예 1.5명꼴이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노예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노예의 규모를 보수적으로 잡는 모제스 핀리조차 2만~4만 명의 노예가 있었을 것으로 셈한다.
아테네 시민 1명이 1~2명 노예 소유
노예는 대부분 농업과 가사노동에 투입됐다. 희랍어로 노예를 뜻하는 ‘오이케테스’는 ‘집안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었는데 이런 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작은 토지를 경작하는 가족조차도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형적인 소경영 단위에선 주인과 노예가 함께 일했다. 빵을 굽거나 옷감을 짜는 등의 가사노동부터 농업노동까지 모든 일에서 노예의 손이 필요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유적을 분석한 결과, 잘사는 시민이라고 할지라도 3명 이상의 노예를 두고 사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대신 3~4명의 소가족으로 구성된 아테네 평균 농가에서 가장이 민주시민으로 활동하기 위해선 보조 노동력으로 노예 1~2명이 꼭 필요했다. 대규모로 노예를 두는 게 일반적이진 않았지만 노예를 이용하지 않는 것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대신 로마의 대농장이었던 라티푼디아와 달리 대규모 노예 집단이 토지를 경작하는 일은 없었다. 노예 집단 거주 지역이 따로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공공건물을 짓는 건축공사에선 노예와 주인이 모두 같은 임금을 받고 같은 종류의 일을 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노예의 임금은 주인에게 돌아갔다는 점이다. 임금과 노예 부양에 드는 비용 간의 차액이 주인의 몫이었다. 노동력 대여와 임금 지급은 모두 엄격한 계약 아래 이뤄졌다. 모든 노예가 주인과 같이 산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주인과 따로 살면서 노예 나름대로 사업을 해서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들 ‘따로 사는’ 노예는 주인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되 일정액을 주인에게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과 사이가 좋은 가내노예는 해방의 기회를 얻기도 했고, 별거하면서 장사하는 노예는 돈을 벌어 자유를 사고자 하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다.

부자들은 때때로 대규모로 노예 노동에 투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의 글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 장군 니키아스는 노예를 1000명이나 소유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글에는 히포니코스가 600명, 필로미데스는 300명의 노예를 뒀다고 나온다. 대규모 노예 노동이 투입된 곳은 주로 광산이었다. 아테네에는 은을 채취할 수 있는 광산이 많았다. 노예 노동이 광범위하게 이용된 라우리온 은광 같은 곳의 경우는 대규모 노예 노동력을 고용하는 대형 청부업자의 존재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NIE 포인트
①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고대 그리스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노예가 생산력을 뒷받침했기에 그나마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가능했을까.

② 따로 살며 독자적인 경제활동도 가능했던 조선의 노비와 고대 그리스 노예 간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③ 비효율성과 인권 중시 등으로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북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서 비합법적인 노예가 존재하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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