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다면' 용법의 핵심은 '가정적 조건'을
나타내는 데 있다. 하지만 요즘은 실제 일어난
사실에도 쓴다. 어색함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라면'의 변신은 무죄?
“지금껏 환자를 조기 발견하고 격리하는 방식의 방역 전략을 ‘취했다면’ 이제는 재택근무 등으로 사람 간 거리를 넓혀 코로나19의 확산 속도를 늦춰야 한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지난 2월 말. 감염병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방안이 제시됐다.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쓰인 ‘취했다면’에 있다. 이 말이 보는 이에 따라 문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본래 ‘가정적 조건’문에 쓰던 연결어미

어미 용법 가운데 최근 들어 ‘-라면/-다면’은 전통적 쓰임새와 좀 다른 양상을 보여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어떤 사실을 가정해 조건으로 삼는 뜻을 나타내는’ 연결어미다. “내가 너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네가 그 꼴을 보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보이는 이들의 전형적인 용례다.

그런데 앞의 ‘취했다면’ 문장과 다음 사례는 이들과 좀 다르다. ①그동안 우리 경제가 성장에 중점을 둬 왔다면 이제는 분배에 신경을 써야 할 때다. ②유럽 축구가 힘을 바탕으로 한다면 남미 축구는 기교를 중시한다. ③20세기 제조업 혁신 모델이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 시스템이라면 서비스 혁신은 맥도날드가 시발점이었다.

모국어 화자들이 느끼는 이 문장의 자연스러움은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 어색하게 느낀다면 그들은 전통적 어법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면 이들은 현실언어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라면/-다면’ 용법의 핵심은 ‘가정적 조건’을 나타내는 데 있다. 하지만 요즘은 예문처럼 실제 일어난 사실에도 쓴다. 어색함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의미적으로는 앞절(이미 일어난 사실)과 뒷절(현재 일어나는 또는 향후 일어날 일)을 비교하는 구문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초기 방역은 이미 ‘취해진’ 것이다. 가정하는 상황이 아니다. 예문 ①, ②, ③ 역시 실현된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전통적 용법이라면 각각을 ‘취했지만’ ‘~둬 왔는데’ ‘~하는 데 비해’ ‘시스템이지만’ 정도로 쓸 것이다.

요즘은 ‘이미 일어난 일’ 비교하며 써

‘-라면/-다면’은 역사적으로 그 쓰임새를 확장해 왔다. 한글학회에서 1957년 완간한 <조선말 큰사전>에서는 ‘-라면/-다면’을 ‘-라고 하면/-다고 하면’의 준말로 보았다. 그렇다면 ‘-면’의 용법을 규명하는 게 핵심이다. <조선말 큰사전>만 해도 ‘-면’을 받침 없는 어간에 붙어 가설적 조건을 나타내는 토로 풀었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키가 크면 속이 없다’ 같은 데 쓰인 ‘-면’이 그 예다. 이후 사전마다 풀이와 용례가 세분화되고 풍부해졌을 뿐 그 근간은 줄곧 이어지고 있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1991년)을 비롯해 <연세 한국어사전>(1998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2009년) 등이 모두 그렇다. ‘뒤의 사실이 실현되기 위한 단순한 근거 따위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등 용법이 확장됐으나 이 역시 요즘 쓰이는 ‘-라면/-다면’의 비교 용법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용법이 광범위하게 쓰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전 풀이로는 설명이 안 된다. 아직은 비(非)규범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미 현실 어법으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면 사전 풀이를 보완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그래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