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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왜에 불교·탈춤·음악 전파…중국엔 도금갑옷 수출

     불교를 정치·경제 목적으로도 倭에 전해백제의 대(對)왜 정책은 6세기에 들어서 불교문화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성왕은 높이 16척의 ‘장육불’을 제작해 왜국에 기증했으며, 노리사치계를 금동불상, 번개(幡蓋·불상 위를 덮는 비단), 경론(經論) 등과 함께 파견했다. 또 588년(위덕왕 35년)에는 승려들과 조불공, 조사공(명주실을 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 노반박사(탑 기술자), 기와박사, 화공 등을 파견해 아스카사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줬다. 본존인 아스카 대불을 제작한 구라쓰쿠리도리(鞍止利)는 백제계라고 한다.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는 옛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독일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참다운 모습을 이토록 표현한 예술품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품격이 다른 예술품이다. 제작 주체를 놓고 많은 설이 있었지만, 형태가 우리 것들과 비슷한 데다 목재가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백제 또는 신라 제품이거나, 왜국에 정착한 조불사가 만든 것으로 정리됐다. 또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의 대보장전에는 209㎝의 훤칠한 키와 우아한 손끝으로 옷자락을 살며시 든 7세기께 관음보살상이 전시돼 있는데,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이 불상에는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채로 내려왔다. ‘백제’ 이름 붙은 호류지 관음보살상백제는 직조산업이 발달해 6세기께는 베·비단·명주실·마 등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에 재봉기술을 가진 공녀(工女)를 왜국에 보냈고, 418년에는 백색 명주를 10

  • 경제 기타

    '양회'가 뭐길래…국제사회 눈은 베이징에 쏠린다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개막했다. 해마다 3월 초 베이징에서 열리는 양회는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와 국정 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를 가리킨다. 그해 중국의 주요 정책방향이 양회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매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다.전인대는 지난 5일, 정협은 4일 시작했으며 열흘 넘게 이어진다. 지난해 코로나19 사태에 시달린 중국은 이례적으로 양회를 5월로 미룬 적이 있다. 양회가 끝날 때 제시했던 경제성장률 목표치도 내놓지 않았다. 올해는 양회 일정을 3월로 원위치했는데, 방역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포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봄마다 열리는 전인대·정협 어떤 역할전인대는 중국의 최고 국가권력기관으로 국가의사결정권, 입법권 등을 갖고 있다. 전인대에서 총리는 업무보고를 통해 전년도 경제상황을 정리하고 그해 경제정책과 사업계획을 발표한다. 정협은 중국 공산당이 정책을 결정할 때 의견을 수렴하는 정책 자문기구다. 전인대에 각종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직접 법을 제정하거나 정책을 결정할 수는 없다.양회의 역사는 60~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협은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국가 선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에 처음 개최됐다. 전인대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1954년 시작했다. 정협과 전인대는 한동안 시기를 달리해 열리다가 1959년부터 함께 개최되고 있다. 과거 양회는 공산당 뜻에 거수기처럼 따르는 ‘요식행위’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올해 양회가 더 주목받는 이유는 사실상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구약시대의 유대민족은 재산이나 소득의 10분의 1을 신에게 바치는 ‘십일조’ 관습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재산의 10분의 1을 바쳤고, 그의 손자 야곱은 하느님이 무엇을 주든지 그 10분의 1을 반드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다.중세 유럽의 교회는 주민들에게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세로 징수했다. 유대교 관습에서 비롯된 십일조를 점점 신자의 의무로 강조하다가 아예 세금으로 강제 징수한 것이다. 교회세는 17~18세기 근대에 들어서야 폐지됐다. 1만여 년 전 농업혁명 이후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적의 침입을 막을 군대가 필요했다. 수시로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기에 공동체에서 이들의 생계를 위해 곡물을 걷어준 것이 세금의 기원이다. 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 이집트에서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께 고대 이집트에서 등장했다. 이집트 고분벽화에는 세금 징수원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고대 국가의 백성은 군주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백성은 군주에게 공물이나 노역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기꺼이 내는 사람은 없다.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는 해법은 세금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금은 내세와 영혼 구원에 대한 대가였던 셈이다. 종교를 담당하는 사제계급에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1799년 나폴레옹이 발견한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에 적힌 글귀는 신전의 세금 면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국가가 세금을 걷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명목은 생명 보장이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됐던 시대에 군주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대신 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단순 주조품보다 뛰어난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의 정교한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한국은 많은 나라가 선망하는 국가다. ‘한류’는 선진국에서도 인기몰이 중이다. 50년 만에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 산업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산업이 발전하고,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나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산업’에 대한 오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신과 저평가, 역사학자들의 편협함 때문에 이를 잘 알지 못한다. 베이징 근처에서도 발견된 원조선 유물들원조선은 어떤 종류의 산업이 발달했으며,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농업과 어업, 임업, 목축업 등 1차 산업과 성을 쌓고 도로를 닦고 거대한 고분 및 고인돌을 만드는 토목업, 조선업 등은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그런데 기술력의 정수, 응용 범위의 확장, 기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면 화공(化工)을 이용한 요업(세라믹)과 금속을 이용한 군수산업, 제사산업이 핵심이었다.원조선 전기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기였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 근처의 강상무덤(崗上墓)과 루상무덤(樓上墓), 요하(遼河) 동쪽 지방인 요동의 정가와자 무덤들(선양 정가와자에 있는 유적), 요서의 십이대영자 무덤 등에서는 청동 단검, 청동 도끼, 청동 끌, 청동 화살촉, 수레 부속품, 마구류, 단추 등 각종 청동 제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 가운데 원조선의 금속산업과 기술력을 알려주는 유물은 상징성이 강하고, 기능성이 높으며, 난도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비파형 동검(고조선식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과 청동거울(잔무늬 거울, 거친무늬 거울)이다.고대사회에서 칼은 무기로 기능했고 정치력을 의미했으며, 상징성도 강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특별한 형태와 표방한 논리로 인해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면은 어떻게 세계의 식단으로 자리잡았을까

    국수는 누구나 좋아한다. 밥보다 면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이 먹는 짜장면은 하루 150만 그릇으로 추정된다. 또 세계라면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라면을 연간 38억 개, 1인당 76개를 먹는다. 연간 소비량은 7위지만, 1인당 소비량은 2위 베트남의 52개를 앞서 단연 1위다. 한국인만 그런 것도 아니다. 면 요리는 아시아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인의 주요 식단으로 자리잡았다.국수는 한자로 면(麵), 영어는 누들(noodle)이다. ‘noodle’은 독일어로 국수를 뜻하는 누델(nudel)에서 왔다는 설과 라틴어로 매듭을 가리키는 노두스(nodus)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로마시대의 유적에서 파스타를 만드는 도구가 발견된 것을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누들로드 위의 밀과 국수국수는 쌀 메밀 등으로 만들지만 주원료는 밀이다. 밀은 BC 7000년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처음 재배됐다. 이 지역에서 사용한 맷돌이 유물로 남아있다.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을 벗기고 빻아 밀가루를 채취하기까지 상당한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반면 기온과 습도가 높은 아시아에서는 밀 대신 쌀을 주로 재배했다. 쌀은 노동집약적이면서 밀보다 산출량이 많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밀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BC 5000년께 중국으로 전래됐다. 황하유역은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해 밀 재배에 적합했다. 국수도 밀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번성했다. 거꾸로 중국의 국수 문화가 중동과 유럽에 전파됐다는 주장도 있다. 황하 상류의 라지아 지방에서 BC 2000년께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국수의 흔적이 발견돼 중국 기원설의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국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야의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 서쪽지역 지배…대한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한 것으로 봐야

    5세기 들어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가야, 양안 국가 체제 선택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우수한 철제무기로 3~4세기 일본 진출한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과 4국 해양 경쟁시대 열어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5세기에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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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성없는 전쟁' 반도체 패권 쟁탈

    지난달 별세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한국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우리도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삼성이 1인당 국민소득(GNP 기준) 500여달러 시절이던 1974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세계 1위 기업에 오르고 휴대폰 시장에서도 스마트폰의 원조인 애플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삼성은 명실상부하게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수십 년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에 힘입어 2018년에는 비메모리를 포함한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미국 인텔에 이어 2위로 밀려났다. 삼성은 지난 5월 비메모리 분야인 파운드리 생산시설에 10조원을 새로 투입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비메모리도 강화해 반도체 전체 1위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전략이다.미국은 지난 5월 자국의 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통제조치를 내렸다. 중국이 ‘반도체굴기(起: 밑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정상에 오른다는 의미)’를 선언하며 반도체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데 대한 견제라는 분석이다. 또한 미국의 그래픽처리장치(GPU) 1위 업체인 엔비디아는 지난 9월 영국의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400억달러(약 47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ARM 인수를 추진하던 삼성전자 등을 따돌리고 미국이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려는 것으로 풀이된다.이에 맞서 중국은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2018년 미국 퀄컴이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NXP 인수를 추진할 때 승인을 해주지 않아 인수가 무산된 바 있다.이처럼 세계는 첨단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