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1) 백제의 문화수출

개방성·다양성·활발한 무역이 찬란한 백제문화 낳아
일본 나라현 아스카에서 발굴된 후지노키고분의 금동관
일본 나라현 아스카에서 발굴된 후지노키고분의 금동관
불교를 정치·경제 목적으로도 倭에 전해백제의 대(對)왜 정책은 6세기에 들어서 불교문화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성왕은 높이 16척의 ‘장육불’을 제작해 왜국에 기증했으며, 노리사치계를 금동불상, 번개(幡蓋·불상 위를 덮는 비단), 경론(經論) 등과 함께 파견했다. 또 588년(위덕왕 35년)에는 승려들과 조불공, 조사공(명주실을 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 노반박사(탑 기술자), 기와박사, 화공 등을 파견해 아스카사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줬다. 본존인 아스카 대불을 제작한 구라쓰쿠리도리(鞍止利)는 백제계라고 한다.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는 옛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독일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참다운 모습을 이토록 표현한 예술품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품격이 다른 예술품이다. 제작 주체를 놓고 많은 설이 있었지만, 형태가 우리 것들과 비슷한 데다 목재가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백제 또는 신라 제품이거나, 왜국에 정착한 조불사가 만든 것으로 정리됐다. 또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의 대보장전에는 209㎝의 훤칠한 키와 우아한 손끝으로 옷자락을 살며시 든 7세기께 관음보살상이 전시돼 있는데,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이 불상에는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채로 내려왔다.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 이름 붙은 호류지 관음보살상백제는 직조산업이 발달해 6세기께는 베·비단·명주실·마 등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에 재봉기술을 가진 공녀(工女)를 왜국에 보냈고, 418년에는 백색 명주를 10필 보냈다. 또 《고사기》에는 백제인 수수허리(須須許理)가 빚은 술을 마신 왜왕이 취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도 일본에는 수수허리를 모신 술 신사가 많다.

백제는 이런 문화산업 외에 문화콘텐츠에 해당하는 예술품을 왜국에 기증하고 수출했다. 《삼국사기》 악지는 백제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의복과 모자, 가죽신발 등을 소개했고, 《수서》에도 백제악을 소개했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5명의 악사가 등장하는데, 비파 등은 중앙아시아와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554년에 백제 악사인 삼근(三斤), 기마차(己麻次), 진노(進奴), 진타(進陀) 등 4인이 다른 악사들과 교대하려고 왜국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상황은 일본의 《악가록(樂歌錄)》에도 기록돼 있다. ‘구다라가쿠(百濟樂)’로 알려진 백제 음악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고려악(고구려 음악)과 함께 일본 음악의 토대를 이뤘다. 춤은 백제인인 ‘미마지’가 유명하다. 그는 오나라(고구려설도 있다)로 가서 기악과 춤 등을 배운 뒤 왜국에 와서 가면무(탈춤)를 가르쳤다. 이 춤에 사용되던 가면은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에 전한다. 712년 출판된 《고사기》를 쓴 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도 백제 유민이었다. 씨름·바둑 같은 유희도 수출백제는 이 밖에 주거·성벽·저수지·도로 등의 토목기술, 각종 군수물자, 의약(채약사), 씨름, 바둑 등의 유희도 수출했다. 오늘날의 한류 현상 및 문화상품의 수출과 같다. 심지어는 황칠을 한 명광개(갑옷), 도금한 갑옷, 무늬를 새긴 도끼 같은 문화 예술품을 중국에 보낸 백제의 문화산업과 기술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국가가 설치한 마부·도·목부 등의 내관과 사군부(군수산업), 사공부(토목산업), 주부(직물) 등의 외관이 문화산업을 담당했지만, 다른 원인은 없을까? 중국의 《북사》와 《수서》의 백제전에 보면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와 중국인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이 섞인 개방적인 사회이며, 다양한 문화를 교환하고,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강점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백제는 문화 전성기를 구가했는데도 오히려 국제 질서에 어두웠고, 왕의 사치가 심했으며, 국론이 분열됐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더니 끝내는 멸망했다. 역사상에는 그리스, 로마, 송나라처럼 기간산업이 아니라 문화산업의 지나친 발달로 인해 정신과 국력이 허약해지다 멸망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번성하고, 한류 현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때 국가와 사회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 및 미래를 위한 노력과 정책도 함께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백제의 대(對)왜 정책은 6세기에 들어서 불교문화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문화콘텐츠에 해당하는 예술품을 왜국에 기증하고 수출했다. 주거·성벽·저수지·도로 등의 토목기술, 각종 군수물자, 의약(채약사), 씨름·바둑 등의 유희도 수출했다.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와 중국인이 있었다. 외국인이 섞인 개방적인 사회이며 다양한 문화를 교환하고,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강점이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