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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10) 중세 농업의 발전 방향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을 1차 산업, 농업의 시작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농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생산성이 낮은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식량 생산에 투입되어야 했으므로 2차 산업(제조업), 3차 산업(서비스업)의 발전은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국제무역의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높은 운송비용으로 인하여 농산물처럼 무겁고 가치가 낮은 상품을 수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경제발전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식량 생산이 증가해야만 하였다. 한국 중세의 인구추세는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던 것은 분명하다.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300만명, 14세기 말 조선왕조 개창 당시에 500만명, 19세기 후반 개항할 때 1700만명이라는 추정에 따르면 중세 동안 장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인구증가 속도가 빨랐다. 이런 인구 증가는 식량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생산요소(노동, 토지, 자본)의 하나인 ‘노동’이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지만, 계속 인구가 늘어나면 종국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노동의 투입으로 획득되는 식량이 점차 줄어드는 지점에 이르게 되고 결국에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림). 중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맬서스 함정’에 빠져 있는 경제였다. 생산성 증가해야 인구증가 지속 가능 식량이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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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미국서 6장 팔린 음반, 남아공에서 수백만장 팔린 '미스터리'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서칭 포 슈가맨’을 통해 본 해적판 경제학 1969년 초겨울, 미국 디트로이트의 밤은 을씨년스러웠다. 비 오는 밤이면 시내 외곽의 낡은 선술집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슈가맨, 서둘러 주겠니. 이 삶의 풍경이 너무 지겹거든. 푸른 동전을 줄 테니 가져다줘. 내 무지개색 꿈을 돌려줘.” 묘한 목소리였다. 어둡고 쓸쓸한 디트로이트 거리와 골목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음색. 사람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가리켜 ‘거리의 음유시인’ 또는 ‘도시의 현인’이라 불렀다.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왜 노래를 부르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음반업체 관계자도 그 목소리에 매료됐다. 그렇게 해서 제작한 그의 첫 앨범. 하지만 곧 미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음반이 된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달랑 여섯 장만 팔린 것. 음반업체 관계자는 지금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다시 선술집에 나타나지 않았죠. 정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노래였는데….” ‘서칭 포 슈가맨(2012)’은 1970년대 실존 인물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슈가맨은 앨범 타이틀곡 제목이자 로드리게스의 애칭이다. 실패의 복잡한 이유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습니다. 마케팅이 부족했나? 사회 비판적인 가사 때문이었을까?” 영화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당시 음반을 만든 제작자였다. “어쩌면 로드리게스라는 이름이 문제였을 수도 있죠. 당시 백인들은 라틴계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로드리게스의 실패는 제작자가 수요를 잘못 예측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프 1>에서처럼 수요곡선은 예상과 달리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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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5) '비교우위' 따른 축구 감독의 선수 선발
축구 국가대표팀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무성하다. 월드컵이 코앞이라 축구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 편성부터 맞붙을 상대팀까지, 과거에도 월드컵을 앞두고는 온통 축구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불거진 이슈는 논점이 과거와 조금 다르다. 선수 선발과 관련해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특혜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을 정도다. 홍명보 감독이 대표팀에 부임하면서 밝힌 선수 선발의 원칙은 ‘소속팀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는 선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그동안 잘 지켜졌고, 덕분에 홍 감독은 ‘소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한국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로 각광받았다. 그런데 박주영 선수를 선발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소속팀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부상당해 경기에 나서지 못한 선수를 선발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동안 대표팀의 주전으로 급부상했던 김신욱 선수는 졸지에 후보로 전락했다. 소속팀에서 매 경기 주전으로 나섰고, 골 감각도 물이 올라 최근 1년간 뛴 리그 44경기에서 24골을 기록한 선수가 벤치만 달구던 선수에게 밀려난 셈이다. 이때부터 언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논쟁이 일기 시작했고, ‘소신의 아이콘’이었던 홍 감독은 일순간 ‘타협의 대명사’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홍명보 감독이 자신이 세운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면서까지 박주영 선수를 선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팀 전력 극대화가 우선 홍 감독은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선수를 ‘4-2-3-1’ 형태로 배치하는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한다. 수비에 4명이 서고, 그 위로 수비형과 공격형 미드필더를 각 2명과 3명 배치하는 형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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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9) 고려시대, 재정과 경제 통합
관료제 국가가 봉건제 국가와 달랐던 것은 중앙집권적인 재정제도가 성립되어 국가가 사회적 분업과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8회 참조) 봉건제 국가에서도 국왕이 있었지만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 ‘불수불입권(不輸不入權·immunity)’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료제 국가처럼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조세를 징수하거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국왕 자활의 원칙’에 의해 자기 영지의 수입만으로 재정을 운영해야만 했던 봉건제 국가와 달리 고려왕조(918~1392)는 국가재정에 필요한 재화와 노동력을 전국 어디에서나 수취할 수 있었다. 시장 미발달- 현물로 세금 거두고 지출 지금 같으면 국가재정에 필요한 재화와 노동력은 대부분 시장에서 구입하면 되겠지만,시장경제 발달이 미약했던 시대에는 그럴 수 없었다. 고려왕조는 996년의 철전 발행을 시작으로 1102년 이후 해동통보와 같은 동전을 발행했지만 제대로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세를 수취하여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쌀과 삼베를 비롯한 각종 재화를 현물로 징수하거나 직접 제작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각종 물화를 개경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수운에 필요한 13개소의 조창을 설치했으며, 육상 운송을 위해 전국적으로 도로망을 갖추었는데 22개 도로에 525개소의 역이 설치됐다. 육운보다 편리하다는 수운의 경우에도 4분의 1가량이 운반비용으로 지출된다고 할 정도였고 배가 침몰하는 사고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하는 재화의 물량과 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근대적인 화폐 재정에서는 매년 편성되는 예산에 따라서 국가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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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002년…오클랜드 20연승…경제학적 상상력이 '장외홈런'을 날렸다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머니 볼’을 통해 본 트레이드 경제학 “모두 야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트레이드에서) 중요한 건 선수가 아닌 승리를 사는 거예요. 승리하기 위해 득점을 올릴 선수를 사야죠.”(피터 브랜드) 1989년 마지막 우승 이후 형편없는 팀으로 전락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좀 하는가 싶다가도 시즌이 끝나면 주전 선수들을 다른 구단에 뺏기기 일쑤다. 열악한 구단 재정으로 선수를 붙잡지 못하는 탓이다. 2001년 디비전시리즈에서 맞붙은 뉴욕 양키스와 애슬레틱스 선수단 연봉은 ‘1억1400만달러(양키스) 대 3900만달러(애슬레틱스)’. 애슬레틱스는 양키스에 시리즈 전적 2 대 3으로 석패했다. 이듬해인 2002년. 우승하곤 거리가 먼 구단이란 오명을 벗어던지고 싶은 빌리 빈 단장(브래드 피트)은 제한된 예산으로 최대한 경제적인 야구를 해야겠다는 판단에 따라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 브랜드(조나 힐)를 부단장으로 전격 영입, 기존의 선수단 운영 방식을 완전히 파괴해버린다. 오직 통계로 짜여진 ‘승리 공식’을 따라 스타 플레이어를 과감하게 방출하는가 하면 다른 구단에서 거들떠보지 않던 선수를 팀에 합류시키기도 한다. 나이가 많아 퇴물 취급을 받던 데이비드 저스티스, 사생활이 문란한 제러미 지암비, 특이한 투구자세에 공까지 느린 채드 브래드포드 등을 이런 식으로 속속 영입했다. 2011년 개봉작 ‘머니 볼’ 얘기다. 한계타율과 평균 타율 빈은 선수 영입에서 출루율을 중시한다. 그는 선수들에게 “야구는 피차 소모전이다. 출루하면 이기고 못 하면 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타율과 도루보다는 출루율과 OPS(출루율+장타율)에 무게를 둔 선수 영입이다.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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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4) 위험관리 전문가 '보험계리사'
보험업의 발달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카페였다. 항구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는 다양한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의 카페에는 선박의 출발과 도착 정보, 배당률 등의 정보를 칠판에 적어 놓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로이드의 사위들은 해상 보험 소식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문 ‘로이드 리스트’를 발행했다. 이 자료는 정보의 교환이 어려웠던 당시에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의 항구에서도 유포됐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로이드의 인기는 100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던 중 1771년에는 로이드 카페를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던 보험업자들이 돈을 합쳐 로이드클럽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보험사 중 가장 오래된 로이드손해보험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렇게 발달하기 시작한 해상보험은 보험업 전체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편, 18세기에는 해상보험과 함께 보험을 하나의 산업을 발전시킨 또 하나의 상품이 등장했는데 바로 생명보험이다. 생명보험의 경우 인간 수명과 밀접히 관련돼 있어 예상되는 손익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잘못된 판단으로 높은 보험료를 약속했다가 자칫하면 파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해결해 준 것은 ‘확률론’이다. 수리학의 발달로 인해 등장한 확률론은 연령에 따른 사망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어 비로소 적절한 보험료의 산정과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리스크 평가·측정·통계화 오늘날 보험의 내용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복잡해져, 보험설계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 점차 정교해졌고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보험에 활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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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8) 우리나라 중세는 서양 중세와 무엇이 달랐는가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식민지시대부터 우리나라 중세가 서양의 중세와 닮은 점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근대 이후 세계를 제패한 유럽의 역사가 정상적인 발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본만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였던 이유가 봉건제를 경험하였기 때문이라는 역사관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인류가 원시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전진하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었던 마르크스 주의 역사학자에게는 그러한 역사법칙이 한국사에서도 관철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미래의 전망을 위해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한국 중세에서 봉건제를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군사력을 보유한 영주들이 국가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영지를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서양 중세와 국왕이 과거제도로 선발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전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한국 중세를 똑같이 봉건제 사회라고 칭하기 위해서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집권적 통치와 지방 영주들이 지배하는 분권적통치 무엇보다 서양 중세의 분권적인 정치체제와 대조적인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봉건제 앞에는 ‘아시아적’, ‘집권적’, ‘국가적’, ‘관료적’과 같은 다양한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천동설을 지탱하기 위해서 주전원을 고안한 것과 같았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학술적 곡예를 통해서 다른 점은 모두 지우고 남은 봉건제는 대토지소유자가 토지소유에 기초하여 타인노동을 착취하는 제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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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銀구두 신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로시의 마음을 옐런은 알까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오즈의 마법사’ 를 통해 본 국제통화체제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자장가 속에나 나오던 그런 곳이 있어요~) 미국의 제작사 MGM이 1939년에 만든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Over the rainbow’라는 주제가로도 유명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만든 빅터 플레밍이 메가폰을 잡았다. 미국의 동화작가 프랭크 바움(1856~1919)이 쓴 불멸의 작품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1900년)가 원작인 이 영화는 ‘도로시’라는 소녀가 회오리바람에 날려 오즈라는 마법의 나라에 떨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도로시와 그의 개 토토, 그리고 두뇌는 없지만 말을 할 줄 아는 허수아비, 양철로 만들어진 나무꾼,겁 많은 사자 등이 힘을 합쳐 갖은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스토리는 연극 영화로도 상영돼 청소년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디플레이션 20년의 그늘 2009년 9월에는 영화개봉 70주년을 기념해 미국 전역의 400여개 영화관에서 디지털로 복원된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도로시의 은색구두가 진홍색으로 바뀌었다는 점 외에는 소설의 내용을 충실히 담았다. 주디 갈랜드의 노래 실력과 환상적인 모험을 담은 스토리는 전 세계 어린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원작자 바움이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를 쓴 데는 미국도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의 작품 못지않은 자국 동화를 내놓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소망대로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는 유럽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출간 첫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