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이후 소농경영이 성장하였으며 18세기부터 노비를 이용한 농장경영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농업부문의 변화와 병행하여 조선왕조 재정제도도 17세기를 통하여 크게 변화되었다. 다름 아닌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것이다. 대동법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행된 후 점차 확대되어 1708년(숙종 34년)에 황해도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꼬박 100년이 걸렸는데 대동법에 대한 저항이 컸으며 그런 저항을 이기고 시행된 만큼 재정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공물을 토지 1결당 12말의 쌀로 통일
대동법의 요체는 왕실에 대한 ‘진상’과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대한 ‘공물’을 각종 현물로 납부하는 대신에 쌀로 납부하도록 한 것, 그리고 일정한 규정도 없이 가호(家戶)에 부과하던 것을 토지 면적 1결(편집자주:조선시대 1결은 약 1만㎡)에 대해 쌀 12말을 납부하도록 부과기준이 바뀐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일부 산간지역은 쌀 대신 무명이나 삼베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상평통보 발행 이후에는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한 지역도 생겼는데 기본은 쌀이었다. 전세가 1결에 쌀 4말이었기 때문에 이제 3배나 되는 쌀을 추가로 상납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 중앙과 지방에 납부하던 공물 값과 운반 비용 그리고 지방경비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공물 수취가 토지 면적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다.
대동세는 대략 절반은 서울로 상납하고 절반은 지방경비로 남겨두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1769년(영조45)을 예로 들면, 8도 대동세 총액은 쌀 56만9000여석이었는데 중앙 상납은 55%에 해당하는 31만2000여석, 지방에 남겨두는 지방 유치미는 45%인 25만7000여석이었다. 호조와 선혜청과 같은 중앙 재정기관이 지방 유치미의 사용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과거 지방재정이 거의 관행에 맡겨두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재정운영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또한 각양각색의 공물은 총액을 집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지만 이제 쌀로 환산한 공물의 가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재정에 대한 국가의 수량적 파악 능력이 크게 진전된 것이다.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이헌창 편)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국가재정의 규모는 공식적인 수입으로는 쌀로 환산하여 200만석(중앙 100만석, 지방 100만석) 이며, 중간수탈이나 비공식적 수입을 포함하면 400만석(중앙 150만석, 지방 250만석)으로 추산된다. 400만석은 국내총생산(GDP)의 5% 정도로 추정되는데, 2012년 현재 국가재정이 GDP의 31.0%의 규모이고, 조세부담률(조세총액/GDP)이 20.4%인 것에 비하면 국가의 재정역량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재정은 현재의 약 0.26% 수준
재정규모를 쌀로 추정하였으므로 쌀 가격을 이용하여 현재의 재정규모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현재 쌀 평년가격이 20kg에 4만4286원이므로 18세기 후반의 총재정규모 쌀 400만석은 현재 기준으로는 240만석(1석=140kg) 정도에 해당하여 7440억 원으로 계산된다. 2013년의 총 세입액 282조 4000억원(일반회계+특별회계)과 비교하면 0.26%에 불과한 규모이다. 쌀의 가치가 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많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큰 변화가 진행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러한 계산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동법으로 인해 공물을 쌀로 납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 대동법으로 모든 공물이 쌀(또는 동전, 무명, 삼베)로 납부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며 현물로 납부하는 공물이 남아 있었다.
공물납부 대행하던 방납 사라지고 공인이 등장
대동법의 직접적인 효과는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고 폭리를 취하는 ‘방납’(防納)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방납이 극성하였는데 극단적인 경우이겠지만 생선 한 마리의 방납가가 쌀 10말, 인삼 1근이 무명 16필, 송이버섯 3사발에 무명 40필이라고 할 정도였다. 대동법은 정해진 기준도 없이 관행으로 이루어지던 방납을 부과기준과 공물 가격을 정하여 공식적인 제도로 만든 것이었다. 방납을 제도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대동미를 관리할 관청으로 선혜청(宣惠廳)을 새로 설치하고 공물 납부를 담당할 특수한 상인으로 공물주인(貢物主人) 곧 공인이 선정되었다. 방납인으로 활동하던 자들을 공인으로 흡수하였을 것이다. 현물 공납제에서는 지방마다 정해진 관청에 직접 공물을 상납하거나 방납인을 통해서 대납하였지만 이제 선혜청에 대동미를 상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인은 공물을 납부할 관청과 공물의 종류에 따라서 계(契)가 조직되어 공물 상납을 담당하게 하고 선혜청에서 공물의 가격, 즉 공가(貢價)를 지급하였다. 공물가격은 시장가격의 10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대략 3~4배 정도였다.
공물의 종류는 대전(大殿), 대비전 등의 왕실 각 궁전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물건을 망라하고 있었다. 밥하는 쌀과 장이나 젓갈 담그는 재료부터 과일과 생선은 물론이고 종이와 무기를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였다.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보면 27개의 중앙 관청에 490종의 공물이 상납되고 있었다. 공인의 조직이 모두 몇 개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갑오개혁(1894년)으로 공인이 폐지될 때 미지급된 공가의 청산과 관련하여, 관청 이름으로 된 공인조직이 72개, 물건 이름으로 된 공인조직이 102개가 있었다.
왕실과 관청은 시장 보다 공인 통해 물자 구입
대동법은 지방관이나 지방민의 입장에서 보면 공물 부과의 기준과 납부하는 재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공물을 상납받는 왕실이나 관청의 입장에서는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대동법이라는 대대적인 변화 속에서도 공납제도의 형식이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실이나 관청은 지급받은 쌀(또는 동전, 무명, 삼베)로 필요한 물자를 시장에서 직접 구입하였던 것이 아니라, 공인이라는 특수한 상인을 통해서 기존의 공물장부인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는 공물을 상납받았던 것이다. 공물을 대동미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어느 군현에서 상납하는 대동미는 어떤 공물 몇 개에 해당한다는 꼬리가 붙어 있었고 그것이 공인에게 분배되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방의 관리나 방납인에게 받던 것을 이제 공인에게 받게 된 것뿐이었다. 제용감(濟用監), 사도시(司䆃寺), 봉상시(奉常寺) 등의 과거에 공물 납부를 담당하던 여러 관청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나 각 지역의 영주는 농민에게 쌀로 지대(연공미)를 상납받았는데 이를 오사카의 쌀 시장에서 처분하여 필요한 재화를 구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오사카 지역에서는 전국에서 미곡과 각종 상품이 집중하여 전국적인 시장이 발달하였다.
대동법 시행 후 조선왕조도 쌀로 대동미를 거두어 공인에게 방출함으로써 상업의 발달을 자극하였지만 대동미를 상인들에게 팔아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과거 공물제도의 틀을 유지한 위에서 공인에게 시가보다 3~4배 높은 고정된 가격으로 공물을 상납하도록 하였다. 국가가 상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동법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상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물을 상납받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시장과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공물을 토지 1결당 12말의 쌀로 통일
대동법의 요체는 왕실에 대한 ‘진상’과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대한 ‘공물’을 각종 현물로 납부하는 대신에 쌀로 납부하도록 한 것, 그리고 일정한 규정도 없이 가호(家戶)에 부과하던 것을 토지 면적 1결(편집자주:조선시대 1결은 약 1만㎡)에 대해 쌀 12말을 납부하도록 부과기준이 바뀐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일부 산간지역은 쌀 대신 무명이나 삼베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상평통보 발행 이후에는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한 지역도 생겼는데 기본은 쌀이었다. 전세가 1결에 쌀 4말이었기 때문에 이제 3배나 되는 쌀을 추가로 상납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 중앙과 지방에 납부하던 공물 값과 운반 비용 그리고 지방경비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공물 수취가 토지 면적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다.
대동세는 대략 절반은 서울로 상납하고 절반은 지방경비로 남겨두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1769년(영조45)을 예로 들면, 8도 대동세 총액은 쌀 56만9000여석이었는데 중앙 상납은 55%에 해당하는 31만2000여석, 지방에 남겨두는 지방 유치미는 45%인 25만7000여석이었다. 호조와 선혜청과 같은 중앙 재정기관이 지방 유치미의 사용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과거 지방재정이 거의 관행에 맡겨두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재정운영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또한 각양각색의 공물은 총액을 집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지만 이제 쌀로 환산한 공물의 가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재정에 대한 국가의 수량적 파악 능력이 크게 진전된 것이다.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이헌창 편)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국가재정의 규모는 공식적인 수입으로는 쌀로 환산하여 200만석(중앙 100만석, 지방 100만석) 이며, 중간수탈이나 비공식적 수입을 포함하면 400만석(중앙 150만석, 지방 250만석)으로 추산된다. 400만석은 국내총생산(GDP)의 5% 정도로 추정되는데, 2012년 현재 국가재정이 GDP의 31.0%의 규모이고, 조세부담률(조세총액/GDP)이 20.4%인 것에 비하면 국가의 재정역량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재정은 현재의 약 0.26% 수준
재정규모를 쌀로 추정하였으므로 쌀 가격을 이용하여 현재의 재정규모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현재 쌀 평년가격이 20kg에 4만4286원이므로 18세기 후반의 총재정규모 쌀 400만석은 현재 기준으로는 240만석(1석=140kg) 정도에 해당하여 7440억 원으로 계산된다. 2013년의 총 세입액 282조 4000억원(일반회계+특별회계)과 비교하면 0.26%에 불과한 규모이다. 쌀의 가치가 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많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큰 변화가 진행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러한 계산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동법으로 인해 공물을 쌀로 납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 대동법으로 모든 공물이 쌀(또는 동전, 무명, 삼베)로 납부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며 현물로 납부하는 공물이 남아 있었다.
공물납부 대행하던 방납 사라지고 공인이 등장
대동법의 직접적인 효과는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고 폭리를 취하는 ‘방납’(防納)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방납이 극성하였는데 극단적인 경우이겠지만 생선 한 마리의 방납가가 쌀 10말, 인삼 1근이 무명 16필, 송이버섯 3사발에 무명 40필이라고 할 정도였다. 대동법은 정해진 기준도 없이 관행으로 이루어지던 방납을 부과기준과 공물 가격을 정하여 공식적인 제도로 만든 것이었다. 방납을 제도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대동미를 관리할 관청으로 선혜청(宣惠廳)을 새로 설치하고 공물 납부를 담당할 특수한 상인으로 공물주인(貢物主人) 곧 공인이 선정되었다. 방납인으로 활동하던 자들을 공인으로 흡수하였을 것이다. 현물 공납제에서는 지방마다 정해진 관청에 직접 공물을 상납하거나 방납인을 통해서 대납하였지만 이제 선혜청에 대동미를 상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인은 공물을 납부할 관청과 공물의 종류에 따라서 계(契)가 조직되어 공물 상납을 담당하게 하고 선혜청에서 공물의 가격, 즉 공가(貢價)를 지급하였다. 공물가격은 시장가격의 10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대략 3~4배 정도였다.
공물의 종류는 대전(大殿), 대비전 등의 왕실 각 궁전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물건을 망라하고 있었다. 밥하는 쌀과 장이나 젓갈 담그는 재료부터 과일과 생선은 물론이고 종이와 무기를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였다.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보면 27개의 중앙 관청에 490종의 공물이 상납되고 있었다. 공인의 조직이 모두 몇 개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갑오개혁(1894년)으로 공인이 폐지될 때 미지급된 공가의 청산과 관련하여, 관청 이름으로 된 공인조직이 72개, 물건 이름으로 된 공인조직이 102개가 있었다.
왕실과 관청은 시장 보다 공인 통해 물자 구입
대동법은 지방관이나 지방민의 입장에서 보면 공물 부과의 기준과 납부하는 재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공물을 상납받는 왕실이나 관청의 입장에서는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대동법이라는 대대적인 변화 속에서도 공납제도의 형식이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실이나 관청은 지급받은 쌀(또는 동전, 무명, 삼베)로 필요한 물자를 시장에서 직접 구입하였던 것이 아니라, 공인이라는 특수한 상인을 통해서 기존의 공물장부인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는 공물을 상납받았던 것이다. 공물을 대동미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어느 군현에서 상납하는 대동미는 어떤 공물 몇 개에 해당한다는 꼬리가 붙어 있었고 그것이 공인에게 분배되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방의 관리나 방납인에게 받던 것을 이제 공인에게 받게 된 것뿐이었다. 제용감(濟用監), 사도시(司䆃寺), 봉상시(奉常寺) 등의 과거에 공물 납부를 담당하던 여러 관청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나 각 지역의 영주는 농민에게 쌀로 지대(연공미)를 상납받았는데 이를 오사카의 쌀 시장에서 처분하여 필요한 재화를 구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오사카 지역에서는 전국에서 미곡과 각종 상품이 집중하여 전국적인 시장이 발달하였다.
대동법 시행 후 조선왕조도 쌀로 대동미를 거두어 공인에게 방출함으로써 상업의 발달을 자극하였지만 대동미를 상인들에게 팔아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과거 공물제도의 틀을 유지한 위에서 공인에게 시가보다 3~4배 높은 고정된 가격으로 공물을 상납하도록 하였다. 국가가 상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동법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상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물을 상납받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시장과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