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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로마의 무상복지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00년 제작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마제국의 17대 코모두스 황제는 실존 인물이고, 막시무스 장군은 실제 인물을 토대로 한 가공 인물이다. 코모두스는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부친이 황제일 때 태어나 다음 황제가 된 최초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주로 조카, 양자, 부하 등이 황위를 이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학파(금욕주의)의 철학자이기도 해서 ‘철인황제’란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황제로 로마 역사에 기록되었다. 코모두스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검투와 격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로 분장하고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빵과 서커스’라는 번영의 역설지중해 최강국인 로마제국은 왜 급전직하로 추락했을까? 어리석고 힘만 센 황제 한 명이 천년 제국을 망칠 수 있을까?로마가 급성장한 전반기에는 검약과 강건함,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바다로 진출하던 BC 8세기에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로 뒤늦게 출발했지만, 카르타고와 세 차례나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집정관과 귀족 자제 등이 수십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당연시된 나라였다.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자 로마는 ‘번영의 역설’에 직면했다. 번영의 끝은 곧 쇠퇴의 시작이었다. 본래 로마인은 소식을 했지만, 점점 과식과 폭식을 즐겼다. 또 검투사들의 잔혹한 싸움에 열광했다. 곳곳에 들어선 공중목욕탕, 폼페이유적에서 발견된 홍등가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신라, 울릉도·동해안 점령하며 해양활동 강화

    한민족의 근대 이후 100여 년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다. 35년의 긴 식민지 생활을 자초했고,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자기파멸을 시도하면서 죽음과 폐허, 가난을 남겼다. 그런데 또 50여 년 만에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12년에 영토 확장 신호탄서기 500년, 지증 마립간이 등장했다. 그는 곧 ‘으뜸 되는 간(칸)’이라는 고유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인 ‘왕’으로 고쳤고,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신라’ 등에서 ‘신라’라고 고정시켰다. 신라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즉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512년에 본격적인 영토 확장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그해, ‘김이사부’라는 20대 초의 젊은 왕족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배 이물(앞머리)에 나무를 깎아 세운 사자로 위협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 해양소국을 점령했다. 그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주(自主) 획득과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동해 중부 횡

  • 역사 기타

    지중해 패권 쟁탈…전쟁은 수익성 높은 장사였다

    ‘초콜릿 복근’이 선명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여심을 흔드는 카리스마의 레오니다스 왕은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7년 영화 ‘300’의 상징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란 광고 카피로 유명한 이 영화는 BC 480년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의 격전지였던 테르모필레전투를 그린 작품이다.고대 페르시아 전성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패퇴해 죽은 다리우스 1세의 복수를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를 제압한 뒤 헬레스폰투스해협(현재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들이닥쳤다. 이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1차 방어선으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 포진했다.영화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불굴의 용기로 방어하다 전멸하고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다르다. 선봉에 선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 300명 외에 다른 폴리스들이 보내온 4000명의 병사가 후방을 맡았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을 사흘간 저지했지만, 그리스의 배신자가 페르시아군에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줘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레오니다스 왕은 떠날 병사들은 떠나게 하고 스파르타 300명, 테스피아이와 테베의 병사 등 1400명으로 맞섰다. 그러나 급습을 당한 후방의 테베 병사 400명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앞뒤로 몰려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원 전사했다.테르모필레 협곡을 통과하면서 군사 2만 명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평원을 지나 아테네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계의 일본 진출시마네현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에서 시작된 자동차 산업이 미국과 독일에서 발전한 까닭은?

    1834년 영국 귀족 존 스콧 러셀이 만든 증기자동차가 승객 21명을 태우고 글래스고를 출발했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기 위해 증기기관의 압력을 높이다 차가 전복되면서 엔진 보일러가 폭발했다. 기관의 불을 조절하던 화부와 승객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주행 중 일어난 사고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기록된 자동차 사망 사고다.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증기자동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증기자동차는 괴물로 간주돼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19세기에 세계는 이미 증기기관 시대로 접어들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하며 가축을 이용하던 시대에서 기계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증기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흉물스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굉음과 매연을 내뿜는 데다 그을음으로 빨래를 시커멓게 만들기 일쑤였다.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달리는 괴물’에 대한 시민 거부감은 점점 커졌다.가장 강하게 반발한 집단은 당시 대중교통을 담당했던 마차업계였다. 증기자동차는 마차 속도의 두 배인 시속 30~40㎞에 달했다. 최대 탑승 인원도 28명으로 마차의 두 배였지만, 요금은 마차의 반값이었다. 말과 달리 ‘지치지 않는 기계’에 승객을 빼앗긴 마부들은 일자리를 걱정했다. 마차 업주들과 마부조합은 증기자동차를 규제하라며 영국 의회에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말과 사람이 놀라 위험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증기자동차의 경쟁자인 철도업계도 손님을 잃게 되자 청원에 동참했다. “제발, 저 괴물을 멈춰 달라!” 사람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되는 증기자동차정치인은 예나 지금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경주, 수로 교통 발달한 해항 도시…초기부터 일본 혼슈 진출

    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4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체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초기부터 가야는 물론 왜 세력의 침공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학자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늦게 발전한 원인을 영역이 동남부 내륙지방에 국한돼 고립됐고, 수도가 교통이 불편한 분지였다는 데서 찾는다.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국가 항구로 사용된 감포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인구를 억제해야 할까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마냥 인구가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는 이런 문제에 일찌감치 주목했다. 그는 성공회 성직자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가 1798년 《인구론》을 발표하기 직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작황부진 식량 폭동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18세기 말에 산업혁명으로 팽배하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은 《인구론》을 발표했다.맬서스는 인간의 강한 성욕 때문에 인구 증가를 막기 어렵다고 보았다.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 생산은 천천히 증가해 파국을 맞는다는 것이다. 식량이 늘면 인구가 늘어 노동력이 증가하지만 곧 인구 포화로 임금이 떨어지고 식량이 비싸진다. 임금이 싸지면 지주들은 농업 노동자를 더 고용하게 되어 다시 식량 생산이 늘지만 ‘먹는 입’이 더 빨리 늘어 또 식량 부족에 직면한다. 이런 악순환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맬서스 함정’이라고 한다. 생산성 향상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소득이 정체되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맬서스 함정맬서스 함정은 생산을 토지에 의존했던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리 있는 분석이었다. 14세기 중반에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을 때 임금이 크게 오른 것이나, 16세기 이후에 인구가 늘면서 임금이 떨어진 것과 같은 사례가 즐비했기 때문이다.맬서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구가 곧 부로 간주되던 농경사회에서는 다산이 미덕이었다. 경제 성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구 증가에 의한 것이었을 뿐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사비로 천도해 해양 활동망 튼튼히 한 백제, 中과 문물 교류·日 적극 진출로 강국 부활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라는 항구도시로 천도하면서 해양 활동망을 더 튼튼히 구축했고, 왜국에 진출했다. 오사카부 모즈에 있는 오스카(大塚)에선 300개의 철검이 출토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구다라촌(백제촌)과 구다라강(백제천)이 있는데 과거에는 와니(王仁)씨, 후네(船)씨, 쓰(津)씨, 후지이(葛井)씨 등 백제계 씨족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친백제계인 소가(蘇我)씨가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신흥세력으로 떠올랐다. 쇼오토쿠 태자가 실권을 장악해 백제의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다. <일본서기>에는 577년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 6명과 함께 불상을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중국의 <북사> <수서>와 같은 사서는 “백제에 왜와 중국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백제를 융성시키고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시킨 해양활동과 해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웅진은 금강의 하항도시지만 해양으로 진출하는 데는 다소 불편했다. 천도한 사비는 강을 끼고 있으면서 해양과 가깝게 연결되는 일종의 ‘강해도시’였다.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들이 정박하는 큰 나루(구드래 나루)였다. 필자가 1979년 뗏목으로 금강을 탐사할 때도 부여까지 밀물의 영향이 미쳤다.항해술과 조선술도 발달했다. 백제 선박들은 고구려의 해상권 통제와 북위의 견제 때문에 난도가 높은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즉 금강 하구와 영산강 하구 등을 출항해 황해 남부를 횡단하거나, 황해 중부를 횡단하다가 북풍을 이용해 양쯔강 하구로 진입했다. 비록 구체적인 자료나 실물 증거가 빈약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