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역사 기타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세계 경제를 바꿨다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을 벌였다. 유럽 국가 간의 1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인도, 북아메리카 등의 식민지를 잃었다. 그 후유증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졌고, 뒤이어 혁명전쟁과 이탈리아 원정이 전개됐다. 이런 혼란기에 나폴레옹이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혁명 에너지를 나라 밖으로 돌렸다. 나폴레옹은 개병제에 따라 징집된 150만 대군, 빠른 기동력, 알프스를 넘는 변화무쌍한 전술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유럽을 장악해 나갔다. 이것이 2차 유럽 대전인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다. 강한 군대도 먹어야 싸울 수 있다19세기 초에도 군대의 이동 수단은 말 또는 행군이었다. 2000년 전 로마 군대와 다를 게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주력이 보병이었기에 기동력을 유지하려면 병사의 개인 장비를 줄이고 강행군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보급도 뒤따라야 하는데, 원정 거리가 길어질수록 보급도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전투는 총과 대포로 금방 결판이 나더라도 전쟁은 속전속결이 불가능했다.나폴레옹도 이미 이런 문제를 인식해 병참 조직을 체계화하고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그는 상금을 걸고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공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사에게 지급된 빵은 베개로 쓸 만큼 딱딱했고, 고기 야채 등은 바로 먹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다 넣고 끓여야 그나마 먹을 만했는데, 그럴수록 행군 속도는 느려졌다. 결국 현지 조달로 방향을 틀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식량 조달이 쉬운 지역과 어려운 지역에서 전과가 달랐던 이유다.파죽지세이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러시아 원정이 그런 경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 이남 소국 연합체 '삼한'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남동해안에 무역선·사신선 머문 여러 국제항 만들어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권력을 분산한 지방분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청동기 이후 인류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전기에는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뤘다.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진출했고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는 데 실패해 일찍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四國)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해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유타국 허황옥 설화가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는 ‘가야’ ‘가라’ ‘게야’ 등의 지명이 있으며 보통 ‘韓’으로 표기된다. 후에는 1870년대에 일본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한 ‘정한론’처럼 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 건국과 발전의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데서 이 같은 다양성이 나온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건국설화가 두 개 실려 있다. 하나는 9간(干, 칸)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하나는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 실체를 알기 힘든 허황옥(許黃玉) 이야기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닿았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16세의 여인과 오빠가 있었다.

  • 역사 기타

    병역면제세는 왜 중세에 활성화됐을까

    영어에서 프리랜서(freelancer)는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직업인을 총칭한다. 우리말로 프리랜서라고 쓰지만 영어로는 ‘프리랜스(freelance) 작가’ ‘프리랜스 배우’처럼 쓰는 게 일반적이다. 프리랜서는 고용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맡겨진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일이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므로 정해진 직장이 없고, 일이 없으면 보수도 없다.현대의 프리랜서는 자유 계약직이지만, 그 어원에는 흥미롭게도 중세 역사가 녹아 있다. 프리랜서는 ‘free’와 ‘lancer’의 합성어다. 랜서는 ‘랜스(lance)를 쓰는 사람’, 즉 중세의 용병을 가리킨다. 랜스는 로마제국 후기에 군대에서 사용한 짧은 투창인 ‘랑케아(lancea)’가 어원이다. 중세 기사들이 마상 시합 때 손에 들고서 마주보고 달리며 일합을 겨룰 때 쓰는 게 랜스다. 그러나 정작 중세 때는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영국 작가 월터 스콧이 쓴 소설 《아이반호》에서 중세 용병들을 ‘프리랜스’로 지칭한 것이 시초다. 이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의 귀환에 동요하는 존 왕의 한 가신이 소집한 용병들을 프리랜스라고 부르며 “그 창은 어떤 주군에게도 헌신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유래다. 기사는 소년 시절부터 기사에게 필요한 무예 학문 예의범절 등을 익혀 실력이 쌓이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말과 갑옷은 워낙 비싸 아무나 갖출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주로 귀족의 자제들이 기사가 됐지만, 말과 장비를 유지할 경제력이 없으면 빚에 쪼들렸다. 이 때문에 용병 모집은 고급 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중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하류 차지·해양발전 전략 추진한 신라, 한반도 동남쪽 변방국가에서 끝내 승자로

    단양 하류인 충주는 전근대까지도 한반도 내부에 있는 최고 교통요지였다. 낙동강 수로망이 시작되는 문경에서 육로로 조령(문경새재)을 넘어오면 충주에서 남한강의 수로망과 만난다. 따라서 충주는 낙동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 최고의 수로망, 거기에 육로망이 교차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고, 내륙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한반도 최고 수로망 충주 점령이 때문에 고구려도 이곳을 점령한 직후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그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을 정도였다. 이후 신라는 남해안과 낙동강 수로망, 남한강과 서울지역을 낀 한강 본류의 수로망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질서의 이해>). 조금 훗날이지만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은 신라로 투항했고, 충주의 탄금대로 이주해 살았다. 뛰어난 음악으로 가야의 마음을 통일시키려 했던 그는 운명을 따라 신라에서 자기 뜻을 펼쳤다.신라 사회는 자신감에 가득 찼고, 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특별한 연호를 사용했다.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와 맺은 혼인동맹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공동 점령지였던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신주’를 설치했는데, 초대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고, 훗날 신라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당연히 점령지를 빼앗긴 백제와 멸망 위기에 몰린 대가야는 동맹을 맺고 554년에 신라를 협공했다. 하지만 백제의 중흥군주였던 성왕이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동해안에 북진 발판신라는 승리했지만 백제와

  • 역사 기타

    로마의 무상복지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00년 제작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마제국의 17대 코모두스 황제는 실존 인물이고, 막시무스 장군은 실제 인물을 토대로 한 가공 인물이다. 코모두스는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부친이 황제일 때 태어나 다음 황제가 된 최초 인물이다. 그전까지는 주로 조카, 양자, 부하 등이 황위를 이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학파(금욕주의)의 철학자이기도 해서 ‘철인황제’란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황제로 로마 역사에 기록되었다. 코모두스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검투와 격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로 분장하고 검투사로 나서기도 했다. ‘빵과 서커스’라는 번영의 역설지중해 최강국인 로마제국은 왜 급전직하로 추락했을까? 어리석고 힘만 센 황제 한 명이 천년 제국을 망칠 수 있을까?로마가 급성장한 전반기에는 검약과 강건함,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바다로 진출하던 BC 8세기에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로 뒤늦게 출발했지만, 카르타고와 세 차례나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집정관과 귀족 자제 등이 수십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당연시된 나라였다.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자 로마는 ‘번영의 역설’에 직면했다. 번영의 끝은 곧 쇠퇴의 시작이었다. 본래 로마인은 소식을 했지만, 점점 과식과 폭식을 즐겼다. 또 검투사들의 잔혹한 싸움에 열광했다. 곳곳에 들어선 공중목욕탕, 폼페이유적에서 발견된 홍등가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신라, 울릉도·동해안 점령하며 해양활동 강화

    한민족의 근대 이후 100여 년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다. 35년의 긴 식민지 생활을 자초했고,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자기파멸을 시도하면서 죽음과 폐허, 가난을 남겼다. 그런데 또 50여 년 만에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12년에 영토 확장 신호탄서기 500년, 지증 마립간이 등장했다. 그는 곧 ‘으뜸 되는 간(칸)’이라는 고유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인 ‘왕’으로 고쳤고,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신라’ 등에서 ‘신라’라고 고정시켰다. 신라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즉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512년에 본격적인 영토 확장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그해, ‘김이사부’라는 20대 초의 젊은 왕족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배 이물(앞머리)에 나무를 깎아 세운 사자로 위협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 해양소국을 점령했다. 그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주(自主) 획득과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동해 중부 횡

  • 역사 기타

    지중해 패권 쟁탈…전쟁은 수익성 높은 장사였다

    ‘초콜릿 복근’이 선명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여심을 흔드는 카리스마의 레오니다스 왕은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7년 영화 ‘300’의 상징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란 광고 카피로 유명한 이 영화는 BC 480년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의 격전지였던 테르모필레전투를 그린 작품이다.고대 페르시아 전성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패퇴해 죽은 다리우스 1세의 복수를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를 제압한 뒤 헬레스폰투스해협(현재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들이닥쳤다. 이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1차 방어선으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 포진했다.영화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불굴의 용기로 방어하다 전멸하고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다르다. 선봉에 선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 300명 외에 다른 폴리스들이 보내온 4000명의 병사가 후방을 맡았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을 사흘간 저지했지만, 그리스의 배신자가 페르시아군에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줘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레오니다스 왕은 떠날 병사들은 떠나게 하고 스파르타 300명, 테스피아이와 테베의 병사 등 1400명으로 맞섰다. 그러나 급습을 당한 후방의 테베 병사 400명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앞뒤로 몰려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원 전사했다.테르모필레 협곡을 통과하면서 군사 2만 명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평원을 지나 아테네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계의 일본 진출시마네현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