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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햇빛과 공기에 물린 세금, 창문세

    부인 메리 2세와 함께 영국의 공동 왕위에 오른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3세는 국가 재정 확충이 시급했다. 그의 왕위 계승에 반발한 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재정을 늘리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다. 윌리엄 3세가 새로 도입한 것은 일종의 재산세인 ‘창문세’였다. 건물의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을 물린 것이다.영국에는 창문세 이전에 난로세가 있었다. 찰스 2세는 집집마다 설치된 벽난로에 세금을 부과했는데 난로 한 개에 연간 두 번 물렸다. 난로세는 일종의 부자 증세였다. 잘사는 집일수록 난로가 많다고 봤다. 하지만 곧바로 조세 저항에 부딪혔다. 난로세를 매기려면 세금 징수관이 집 안에 들어가 난로 개수를 조사해야 해 사생활 침해 논란이 벌어졌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는 성난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난로세를 폐지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전체 세금 수입의 10분의 1을 차지하던 세목이 빠지자 재정에 구멍이 났다. 이때 고안한 세금이 창문세다. 창문은 밖에서 셀 수 있어 사생활 침해 논란도 피할 수 있었다.창문세는 잘사는 집일수록 비싼 유리 창문이 많다는 점에 착안한 세금이다. 하지만 그것은 걷는 쪽의 생각일 뿐이었다. 창문세가 시행되자 도시마다 창문을 합판이나 벽돌로 막아버리는 집이 속출했다. 가뜩이나 우중충한 날씨에 창문까지 가리게 된 영국인들은 우울증을 호소했다. 이 때문에 창문세는 ‘햇빛과 공기에 물리는 세금’이라는 오명으로 기록됐다. 오늘날 영국에서 창문이 있어야 할 곳이 가려진 건물은 창문세를 징수하던 17~19세기 때 지은 집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세금이 만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700년 지속한 고구려…요동 정벌로 풍부한 자원 확보

    고구려가 700년 이상 존재하던 기간,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든 흉노, 유연, 돌궐 등 유목제국들을 비롯해 중국에서는 후한, 위나라, 동진, 북위, 송, 제, 양, 진, 심지어는 수나라까지 수십 개의 나라들이 명멸했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Power Shift)》에서 강대국이 되는 조건으로 ‘힘(power)’ ‘부(wealth)’ ‘지식(knowledge)’을 꼽았다. 고구려에 이 세 가지는 철과 말을 바탕으로 한 군수산업과 황금 무역이었다.《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를 생산했다. 지린(吉林)성 북부 농안이나 대안지역에서는 지금도 말을 키운다. 나는 1995년 이곳에서 한 마리에 12만원씩, 세 마리를 사서 직접 타고 지안(集安)까지 내려왔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가다》). 목동이자 기마민인 주몽은 소수의 기마병으로 홀본부여를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북평(北平) 어양(漁陽) 등 현재의 베이징 근처까지 3000리(약 1200㎞)를 기마병으로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 첫해에 동몽골 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을 공격해 소·말·양 떼를 몰고 개선했다. 북방종족이나 한족과 본격적인 기마전을 벌이려면 말산업을 육성하고, 3월 3일의 국중대회처럼 인재를 뽑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말산업·제철산업 연계한 고구려235년에는 양쯔강 하류(난징·南京)에 있던 손권의 오나라에 말을 수백 필 주었다. 하지만 사신선이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삼국지》). 광개토태왕은 산둥반도에 있던 남연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고, 말(송나라 책 《태평어람》에는 천리마), 모피, 화살 등을 수출했다. 장수왕은 439년에 800필의 말을 배에 실어 건강(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화폐가 신뢰를 잃으면 휴지와 다름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는 걷은 돈보다 더 쓴다. 경제가 파탄나는데도 로마의 군인황제들이 저질 은화를 발행한 것도 돈이 급했기 때문이다. 국가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군대를 유지하고 복지사업을 펴고 호화생활을 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세금은 저항이 컸고 정복 지역이 줄어 세금이 쪼그라드는 판이었기에 조폐소에서 귀금속 함량을 줄여 그 차익, 곧 시뇨리지(화폐 액면가에서 제조비용을 뺀 차익)를 챙기는 것은 세금 징수보다 손쉬운 일이었다.은화의 실질 가치가 낮아졌으니 물가가 뛰는 인플레이션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3세기에 로마의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5~6%로 추정된다. 해마다 6%씩 오르면 물가는 12년마다 두 배가 된다. 군인황제시대는 곧 경제와 민생 붕괴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치·경제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순도 100%인 새 은화를 만들어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화폐 시스템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 발행한 은화도 곧 사라지고 물가는 더 올랐다. 급기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가격통제 칙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물가는 법으로 누른다고 내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는 더 위축됐고, 사람들은 못 믿을 화폐 대신 물물교환으로 돌아섰다.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306년 순금으로 새 금화 솔리두스를 만들고,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금을 대부분 가져가 예전 수도 로마는 쇠퇴하고 말았다.시뇨리지는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불린다. 화폐 발행량을 부풀릴수록 물가는 부풀어 오른다. 군인황제들이 불량 은화의 시뇨리지로 국고를 채운 대가가 물가 폭탄이었다. 인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계무역까지 했던 원조선은 동아지중해 무역 강국

     활발한 말 수출과 모피 가공업원조선은 축산업을 장려했고, 특히 말 수출을 했다. 말은 15세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였고, 고가의 무역 품목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장건을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지역)까지 파견한 목적은 흉노의 기마병을 대적할 말(한혈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기》에 따르면 바로 그 시기에 위만조선은 전쟁을 종식시킬 목적으로 태자에게 군량미와 함께 무려 5000필의 말을 한나라에 보내게 했다. 이런 목마산업은 고구려로 계승돼 중계무역까지 벌이게 했고, 발해 또한 유명한 말 수출국이었다.모피 가공업과 무역도 활발했다. 모피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몽골에 240여 년 동안 지배받았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까지 온 제일 큰 이유는 모피의 획득과 모피세 때문이었다. 베링해는 값비싼 ‘해달’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만주는 서만주 건조지대를 제외하고는 숲과 강이 발달해 생태계가 풍부하고, 훗날 제작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지만 호랑이, 표범, 곰, 여우, 담비 등의 동물과 약초, 어류가 풍부했다. 어피 생산도 활발했지만,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 담비가죽은 근대까지도 엄청나게 고가로 팔린 무역 상품이었다. 《관자》에는 원조선이 춘추 전국시대에 산둥반도의 제(齊)나라에 문피(표범가죽)를 수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해양 무역을 벌인 증거다. 북한사학은 기원전 2세기에 단궁, 돈피, 문피, 과하마 등과 반어피 등을 한나라에 수출했다고 주장한다(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중세》). 산업·기술·무역·문화 발달한 강대국또 조개 채집과 무역도 중요했다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구약시대의 유대민족은 재산이나 소득의 10분의 1을 신에게 바치는 ‘십일조’ 관습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재산의 10분의 1을 바쳤고, 그의 손자 야곱은 하느님이 무엇을 주든지 그 10분의 1을 반드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다.중세 유럽의 교회는 주민들에게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세로 징수했다. 유대교 관습에서 비롯된 십일조를 점점 신자의 의무로 강조하다가 아예 세금으로 강제 징수한 것이다. 교회세는 17~18세기 근대에 들어서야 폐지됐다. 1만여 년 전 농업혁명 이후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적의 침입을 막을 군대가 필요했다. 수시로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기에 공동체에서 이들의 생계를 위해 곡물을 걷어준 것이 세금의 기원이다. 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 이집트에서최초의 조세체계는 BC 3000년께 고대 이집트에서 등장했다. 이집트 고분벽화에는 세금 징수원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고대 국가의 백성은 군주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백성은 군주에게 공물이나 노역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기꺼이 내는 사람은 없다.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는 해법은 세금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금은 내세와 영혼 구원에 대한 대가였던 셈이다. 종교를 담당하는 사제계급에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1799년 나폴레옹이 발견한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에 적힌 글귀는 신전의 세금 면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국가가 세금을 걷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명목은 생명 보장이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됐던 시대에 군주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는 대신 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화려한 옥 공예품과 철 가공품…원조선의 산업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았다

    한국은 1962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서울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옥상의 전광판에 뜬 숫자를 확인하며 등교하던 까까머리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다. 500년간 농사만 짓던 사회가 공업과 무역을 국가 전략으로 택했다. 그 결과 2019년에는 무역액 1조달러를 넘어 세계 무역 8강,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됐다.현생 인류는 초기부터 상업을 했고, 곧 원거리 무역을 했다. 3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유적지(유럽의 중심부)에서 지중해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가져온 조개껍데기가 발견됐다. 뉴기니와 북부 뉴아일랜드섬에 살던 사피엔스는 칼날을 대신한 흑요석을 바다 건너 400㎞ 떨어진 뉴브리튼섬에서 가져왔다. 발트해의 호박, 지중해의 조개껍데기가 1500㎞ 내륙으로 들어간 홍적세 크로마뇽인 유적지에서 발견됐다(재러드 다이아몬드 《어제까지의 세계》). 그렇다면 만주와 화북 일대, 동아지중해권에서 근거리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대 중국 능가한 원조선의 산업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주나라나 춘추전국시대라 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사회로 안다. 반면 기원전 10세기 전후의 우리는 원시적인 수준이었으며, 산업도 외국 무역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조선은 제련술과 제철술 등 금속산업과 요업(세라믹)이 매우 발달해 뛰어나고 화려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기술력이 발전했고 지식과 경험을 활용한 실용과학 수준이 뛰어났던 결과다. 당연히 다른 분야 산업들도 동반 발전했다.광업도 발달했다. 원조선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이 다양한 자원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1970년까지 북한 경제가 우리를 앞선 것은 일본이 건설한 중화학공업 잔재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삼각무역으로 어떻게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을까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해적선 블랙펄호의 선장 잭 스패로는 늘 술에 절어서 산다. 조니 뎁이 연기한 스패로는 흐리멍텅한 눈에 흐느적대며 걷다 가도 상황이 바뀌면 잽싸게 달려가는 유쾌한 인물이다. 스패로 같은 해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이 바로 럼이다. 럼의 별칭이 ‘해적의 술’ ‘선원의 술’이기도 하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발효해 증류시켜 만든 게 럼이다. 럼은 위스키, 보드카 같은 증류주답게 무척 독하다. 알코올 도수가 최하 40도다. 럼의 색깔은 투명한 것부터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데, 오크통에 넣어 숙성시키는 기간과 럼에 캐러멜을 섞는 정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악마의 창조물’ 설탕과 노예무역럼에 대해 말하다 보면 설탕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커피나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게 자연스럽지만 근대 초기까지도 설탕은 비싸고 귀한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설탕은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가 중국의 차를 네덜란드에 전하며 유럽으로 퍼졌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차 문화가 만개한 곳은 영국인데, 1662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의 왕 찰스 2세와 결혼한 이후 널리 퍼졌다. 18세기에 영국이 해양 패권을 장악하면서 인도 등 동인도산 홍차와 카리브해의 서인도산 설탕이 대거 유입됐다. 신대륙에서 설탕이 들어온 뒤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이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에도 퍼졌다.유럽인이 설탕을 처음 접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때다. 그의 군대가 인도에서 단맛이 나는 식물인 사탕수수를 발견해 가져왔지만, 유럽에는 재배할 곳이 없었다. 카라반을 통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현대에도 재현하기 어려운 0.3㎜ 잔무늬 청동거울…원조선 후기에는 갑옷·쇠뇌 등 철기문화 꽃피워

    원조선의 청동거울은 기원전 5~4세기에 제작됐는데,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신물(神物)이며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무늬선의 곱고 거친 정도에 따라서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과 ‘거친무늬 거울(다뉴조문경)’로 나눈다. 잔무늬 거울은 실낱처럼 가는 수천 개의 선, 하늘을 상징하는 동심원, 복잡하고 정교한 기하학 무늬와 톱날 무늬로 구성됐다. 신비함과 합리성, 현란한 미의식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룬 결정체였다. 반면 거친무늬 거울은 번개무늬 별무늬 방사상무늬 동심원 등이 조합돼 무늬선이 거칠며 외모 또한 투박했다. 이것은 기술력의 퇴보가 아니라 문화의 성격이 변모하고, 실용성이 높아진 시대 상황 때문이다.청동거울 대량 제작이 원조선의 전반적인 산업화에 기여한 정도는 측량할 수 없지만, 금속공학과 제련술 등을 크게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청동 방울들과 장식품 등 다양한 금속제품이 제작됐고,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한참 앞선 합금·주조 기술그렇다면 원조선인들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제작 재료인 동 주석 아연 운석 등 지하자원을 채굴하는 광업도 중요하지만, 제작하는 청동 합금기술과 청동 주조기술은 더욱 중요하다.원조선의 청동 제품들은 구리 주석 연(鉛) 아연 등을 섞은 ‘연아연청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청동거울을 만들 때는 무기 제작 때보다 구리에다 주석을 많이 넣고, 아연과 연의 비율을 올렸다. 그래야만 주조성과 반사효과를 높이고, 색깔도 변화시켜 장식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에 만들어진 세형 동검 등은 주석의 비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