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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4세기 유럽을 휩쓸고 간 페스트…동서 교역로를 통해 공포가 퍼져나갔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탄생했다. 1346년 흑해 크림반도 카파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불과 5~6년 만에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보카치오는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데카메론》 첫머리에 ‘1348년 3~7월의 5개월간 피렌체에서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10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다소 과장해 썼다.페스트는 본래 중국의 오지, 중앙아시아 등의 풍토병이었다. 페스트균을 지닌 검은 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매개로 전염된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1330년대 초, 중국에서 돌기 시작해 서쪽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페스트가 발생한 중국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줄어들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몽골이 지배한 원나라가 몰락한 요인 중 하나다. 동서 교역로로 전파된 페스트당시 유럽에서는 페스트로 3~4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이다.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수많은 괴담을 생산했다. 대표적인 것이 페스트가 몽골의 생화학 무기였다는 속설이다. 몽골계 킵차크한국 군대가 1347년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카파를 공격할 때,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투석기로 성안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흑해 연안 일대에는 이미 페스트가 퍼져 있었고, 카파도 그 영향 아래 있었다. 다만 카파에 있던 상인들이 각 나라로 귀국하면서 더 빨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대역병이 유럽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데는 그럴 만한 조건이 구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세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페스트가 유행한 원인을 농업과 도시화, 교역 활성화에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변 수륙 물류 중심지에서 일어난 백제…잇따른 정복 전쟁으로 서해 해상권 확보 나서

    백제는 활발한 해양활동을 바탕으로 국가경영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멸망할 당시 인구만 해도 76만 호(약 380만 명)로 삼국 가운데 가장 많았다. 해양 활동만큼이나 해외 진출도 많았다.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뒤 백제인 다수가 일본열도로 탈출하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안타깝게도 많이 잊혀졌다. 고구려에서 나와 새로운 국가건설기원전 20년쯤의 어느 날,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부여의 소서노, 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군사와 백성들은 압록강 하류를 출항했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꾼 그들은 원조선인들의 이주와 무역로였던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서해안을 내려오다 경기만 한강 하류에 상륙했다. 경기만은 넓고 작은 만들이 발달한 데다 동아지중해의 여러 항로와 연결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다. 또한 이 해역으로 흘러드는 한강은 전장 512㎞에 달하는 하계망을 이용해 내륙을 통합시키는 데 유리하며, 하류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백제의 중추가 된 위례성<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溫祚)는 위례성(지금의 서울 강동구, 송파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백제의 초기 국가명)를 세웠다. 서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넓은 수계망을 이용한 수륙교통과 해양교통이 교차하면서 온갖 물품이 모여드는 물류의 허브였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1930년대까지도 서빙고까지 영향을 끼치는 밀물을 이용해 마포, 용산까지 들어왔다. 이른바 ‘하항도시’와 ‘해항도시’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강해(江海)도시’였다.형인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 문학산성 일대)로 이동해 정착했다. 인천 지역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국 남북조와 '동아시아 4강' 형성한 고구려…전투·외교·무역 병행하며 국가 위상 높였다

     장수왕의 해양 진출광개토대왕으로부터 광대해진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꾸준히 요서를 공략하는 한편 북연과 북위, 송나라가 벌이는 중국의 질서재편전에 참여해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427년에는 400여 년 동안 북방 진출의 거점이었던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1866년에도 미국 기선인 제너럴셔먼 호가 입항한 서해와 연결된 항구도시인 평양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해양 진출과 해양 외교를 유리하게 추진하는 교두보였다.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한 뒤 남진을 계속했다. 서쪽은 금강 이북과 대전 일부 지역을, 동쪽은 경북의 순흥 안동 청송을 지나 영해까지 영토로 삼았다. 481년에는 포항 외곽까지 공격해 육지 영토를 넓혔다.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아 평양, 강화, 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중국 남북조와 치열한 해상권 다툼서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지중해 각국의 해상권 다툼도 치열했다. 북위는 480년 고구려가 남제에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했으며, 6세기 초에는 남제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서해 해상을 봉쇄한 적도 있었다. <위서> 백제전에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펴는 일종의 해상봉쇄에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무역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황금, 은, 모피, 무기, 말, 인삼 등 수출품의 질도 뛰어났다. 제주도(涉羅)에서 ‘가(珂)’라는 보물을 구해 북위와 무역하기도 했다.4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미국의 화웨이 제재…5G 통신망도 진영대결

    안녕하세요. 화웨이는 1987년에 세워진 중국 통신 장비 제조 기업인데 지금은 통신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대가 됐습니다. 특히 5세대(5G) 이동통신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합니다. 2016년만 해도 화웨이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25%로 스웨덴의 에릭슨에 이어 2위였는데, 2018년에는 31%로 세계 1위가 됐습니다. 삼성은 5% 정도에 불과했습니다.미국은 여러 가지 제재를 통해 세계가 화웨이의 5G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화웨이에 대한 의심은 2008년 무렵부터 시작됐습니다. 화웨이는 당시 미국의 네트워크 장비 기업 스리콤(3COM)을 인수하려고 시도했는데 미국 정부가 차단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이 중국 인민군과 유착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습니다. 또 2018년 4월 이동통신산업협회(CTIA)가 발간한 ‘글로벌 5G 경쟁’ 보고서는 첨단 기술 경쟁에서 미국이 중국에 뒤처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 기업 제품 사용 금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2019년 국방수권법(NDAA)’에 서명했습니다. 그해 10월에는 런정페이 회장의 딸이자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멍원조우가 캐나다에서 체포됐습니다. 미국이 요청해서 이뤄진 일입니다. 2020년 5월 미국 상무부는 미국이 아닌 한국 등 제3국에서 제조한 반도체라도 미국 기술이나 장비를 활용한 제품은 화웨이에 팔지 못하게 하는 제재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안보와 경제적 이유로 화웨이 제재 나서미국이 화웨이 제재에 나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입니다.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통해 자유세계의 정보가 중국에 도청당할 수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장기 저성장에도 엔화 가치는 '탄탄'…두 얼굴의 일본, 경제대국 계속 유지할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 경제 이야기입니다. 일본 경제는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늘 시들시들한 모습인데요. 또 다른 한편으로 가장 안전한 자산인 엔화로 인해 일본은 가장 안전한 투자의 도피처가 되곤 합니다.오랜 저성장으로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시들시들한 모습부터 살펴볼까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6.2%로 전망했습니다. 소득이 6%나 줄어든다는 말이죠. 블룸버그의 예측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2분기, 즉 4월부터 6월까지의 성장률을 -21.5%로 내다봤습니다. 20% 넘게 소득이 감소한다면 거의 재앙 수준이죠. 여러 해 동안 저성장이 계속돼 온 뒤라 고통이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이후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일본이 최하입니다. 대부분 2% 아래이고 마이너스일 때도 제법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던 경제 규모가 중국에 따라 잡히게 됐습니다. 이제는 중국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안전자산으로 가치가 올라가고 있는 엔화성장률이 이런데도 일본 돈 엔화의 위상은 튼튼합니다. 세계의 주가가 급락했을 때 엔화 가치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월 8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주식가격을 보여주는 다우존스지수가 27,572에서 25,128로 8.9% 떨어졌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2차 유행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미 달러에 대한 엔화의 가치는 1.5% 올랐습니다. 세상의 위험이 커진 만큼 엔화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가치도 오른 겁니다. 또 다른 안전자산인 금의 가치도 같은 기간 1.7% 올랐습니다.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230%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마군단 못지 않은 정예 수군 보유한 고구려…왕성한 정복·외교활동 펼친 '해륙국가'였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3세기 오나라와 해상무역고구려는 원조선의 능력을 계승한 데다 전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요동만과 서해 북부, 동해 북부에서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3세기 전반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 유비가 차례로 죽고 손권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233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드러난 미국의 흑백 소득 격차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국 이야기입니다. ‘Black Lives Matter(BLM: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시위가 미국은 물론 유럽으로까지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는 BLM 시위대가 거리를 점령해서 해방구까지 만드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 사태는 올 11월 미국 대선에 상당한 이슈가 될 것이고 앞으로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입니다.시위에 불을 붙인 것은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이지만 경제적 격차에 대한 분노가 연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BLM 시위는 2013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요. 시위대의 요구 사항이 책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경찰이 흑인을 차별하지 말라가 가장 앞에 나오지만 그 뒤로는 대부분 경제적인 요구입니다. 백인의 차별과 착취 때문에 흑인의 처지가 가난하니까 그에 대한 보상을 해라. 모든 흑인에게 소득과 주거, 의료 교육을 보장하라. 이런 내용이 있고요. 재산의 공유화, 자유무역협정의 폐기 같은 것까지 요구 사항에 들어 있습니다.백인에 비해 흑인 소득은 58%, 재산은 6%에 그쳐오늘은 미국 내 흑백 경제적 격차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2018년 현재 미국 백인의 1인당 소득은 4만2700달러, 흑인의 평균 소득은 2만4700달러입니다. 흑인 소득이 백인 소득의 58%에 불과하니 상당한 격차가 존재합니다.재산 격차는 엄청난데요. 비즈니스 인사이더 자료에 따르면 백인 가구의 평균 재산은 10만2000달러인 데 반해 흑인 가구의 평균 재산은 6000달러, 백인의 6%에 불과합니다. 미국 흑인은 재산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미국의 통계청인 센서스 뷰로가 2015년 인종별 소득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백인 소득이 3만2000달러이고 미국 흑인이 2만달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