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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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7)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
서양의 중세는 1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중세 후반기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으 로 인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그동안 절대적 진리로 인식되고 있던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 초가 흔들리게 되자 이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중세 후반 기에 등장한 사상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철학에 의해서 체계화된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철학적으로 논증하고자 하였다.위기에 처한 그리스도교와 아퀴나스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퀴나스는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권위자였던 알베르투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웠으며,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한 뒤 그리스도교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 파리 대학에서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등장으로 인해 신앙과 이성의 갈등을 둘러싼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신을 부인한 아리스토텔레스신앙과 이성의 관계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기 전, 즉 교부철학 시대에는 ‘이성’보다 ‘신앙’이 절대적 우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12세기경 이슬람 세계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번역이 역수입되어 그의 철학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세계는 자연 안에 있는 자신의 운동 원리에 따라 스스로 완성된 것이며 신과 같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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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우구스티누스 (하) 고백록
신의 은총과 관용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뉜다. 1권부터 9권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체험한 회심을 정점으로 살아온 시간을 회고하며 신의 은총을 찬양한다. 10권에서는 회심의 주체인 자아와 기억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통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1권부터 13권까지는 창세기 해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백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하는 과정이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회심 장면이 결정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회심 직전 그의 자기성찰 대목이다.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왜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했을까?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 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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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우구스티누스 (중) 시간론
서양 철학사에서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철학자들이 연구를 해왔지만,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시간 문제를 포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 철학자 후설은 난해한 시간 문제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해결을 보고 “아무리 지식을 자랑하는 현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 이해에 있어서는 그 문제와 씨름했던 이 위대한 사상가보다 더 깊이 있고 의미심장한 발전을 보지 못했다” 라고 극찬했다.과거·현재·미래···탐구하기 어려운 시간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 문제 탐구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막연히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설명하려니 비로소, 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뭔가 알 것 같은데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시간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먼저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시간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는 법. 그러나 시간은 객관적으로 분명히 있는데, 냉철히 분석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세 축을 이루는 ‘과거’는 이미 흘러 지나갔기에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하나만 있는 셈인데 그것도 순식간에 과거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면, 현재라는 것도 결코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마음의 시간 ‘카이로스’가 중요이에 대한 해결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식의 내면에서 체험된 시간 이해를 제시했다.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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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교부철학(상)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그리스도의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기여한 학자들을 ‘교부’라 부르며, 이들에 의해 확립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교부철학이라고 한다. 중세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초기 그리스도교를 접목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교부들이 활동했던 2~8세기는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융합이 시작되는 시기였다.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의 만남이 대개 그렇듯이,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간의 융합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믿음과 이성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성립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은 성격상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교부 철학의 시대로 넘어오기 이전, 즉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철학은 지상의 지혜라 하여 무시되었고, 신의 지혜를 계시로서 가르쳐주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진리라 믿었다. 여기서 이들이 따르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계시란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그리스도교의 계시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합하여 모두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는 것일까? 구약(옛 언약)은 신이 인간에게 한 첫 번째 약속으로서 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기록인 반면, 신약(새 언약)은 신이 인간들과 한 현재의 약속이다. 구약과 신약이 형식적으로는 구분되어 있지만,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 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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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중세철학
흔히 철학사에서 중세라고 하면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이렇게 중세가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속박하였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중세 철학 또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으며,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곧바로 인간의 이성을 다시 강조하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으로 건너뛰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비판철학이란 본래 이성의 힘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일진데, 종교의 권위 아래서 어떻게 진정한 철학이 가능하겠느냐라는 것이다. 중세 철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수업 현장에서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중세 철학 수업은 간단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두어 개 학파에 대한 요약 정리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중세 철학은 철학사에서 생략 가능한 괄호 안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철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19세기 철학자 헤겔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헤겔에 따르면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학적인 용어를 활용하여 형식적으로 반복할 뿐이므로 이는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세 철학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와 같은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철학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전제도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하는데,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미 진리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세 철학에는 비판받을 만한 암흑적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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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 창시자는 제논이다. 스토아 학파라는 명칭은 제논이 아테네 광장에 있던 ‘스토아(서양 건축에서 줄지어 선 기둥으로 된 주랑을 의미함)’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 철학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시대에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등장하였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쾌락에서 행복을 얻고자 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였다.창시자는 제논스토아 학파의 지혜는 이성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진단하고 한계를 긋는 냉철함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에픽테토스의 말을 들어보자.“세상사 가운데는 내 권한에 속하는 것이 있고,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권한에 속하는 것은 생각, 충동, 욕구, 혐오 등 우리가 하는 행위다. 내 권한에 속하지 않는 것은 육신, 재산, 평판, 직위 등 우리가 하는 행위가 아닌 것들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에 의하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살이에서 인간은 참으로 무력한 존재다. 특히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와 같이 미미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가?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 당대 사람들에게 던진 물음이었다.통제 불가능한 것은 무시하자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나에게 속한 것(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겪는 수많은 혼란과 어려움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서부터 초래된다. 이것이 정념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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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1) 에피쿠로스학파
■ 생각해봅시다에피쿠로스학파가 주창한 쾌락은 과도한 욕구 만족과 다르다. 이 학파는 사치스러운 향락을 통한 쾌락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했다. 영혼에 불안한 상태가 없는 평정 상태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의 종류를 구분한 셈이다.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에서 오리엔트 지방까지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동방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동체적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들은 더 이상 도시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유대감이나 일체감을 느낄 수도 없게 되었다.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개인의 생존을 더 이상 공동체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불안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도모하려고 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인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이상적인 행복론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야 하는 생존의 윤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다. 이들은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자족을 철학적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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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리스토텔레스(하) 인간은 정치적 동물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술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 국가를 세우는 이유, 가족과 국민의 자격, 가정과 국가의 목적, 가장 좋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교육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은 정치적(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실 이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전제가 되는 말이다.‘정치학’에 남긴 명언‘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그의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중시되는 ‘본성적으로’라는 목적론적 개념이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명언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래 의미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온전한 내용을 토대로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맥락 가운데 사용됐다. 따라서 이 명언 중 ‘본성적으로’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사상 전체를 하나로 꿰는 화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목적론은 “모든 자연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거나 “모든 자연물들이 본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