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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창기 사치품이었던 시계가 인류의 삶 바꿔놔…19세기엔 영국이 영토와 표준시까지 지배하게 돼

    시계는 근대의 산물로, 등장 초기엔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꼽혔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다. 사치품인 시계는 철저히 징세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의 세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조세 감정인의 신고서는 영국인 사이에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피블스라는 조그만 마을의 조세신고서에는 ‘읍내에는 시계(괘종시계 탁상시계)가 15개, 은제 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 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세금 부과를 위한 것이다. 시청사 시계 건립을 위한 세금 걷기도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싸 공공 부문에서 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356년 볼로냐의 시청사에 공공시계를 건립하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18페니의 세금이 부과됐다. 1386년 프랑스 국왕은 리옹 시의회가 공공시계 건립을 위해 부담금을 징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당시 일부 리옹 시민은 세금 부담 탓에 시계 건립 계획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세기다. 그리고 그 본고장은 영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의 영토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 단위의 기점 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국제위원회는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선을 세계 경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수백년 된 법조항까지 찾아내 기계사용 금지 주장했지만…기계 도입이란 시대적 흐름은 못막아 노동자 더 궁핍해져

    18세기 말 직물의 마무리 작업은 고도로 전문화된 공정이었다. 일부 대형 제조업체는 전 공정을 하나의 ‘공장’(오늘날의 공장과 비교하면 매우 소박했다)에서 수행했다. 고트라는 이름의 기업인은 한 지붕 밑에 80명의 전모공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인은 소규모 직물업자로부터 미완 상태의 옷감을 구입해 작업장으로 보낸 뒤 마무리 작업을 하도록 했다. 리즈의 작업장은 40~50명 또는 60명의 기술자와 수련공을 고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라이딩의 촌락에 있는 더 작은 마무리 작업장에선 겨우 5~6명을 고용했다. 1806년 통계 수치를 보면 웨스트라이딩의 직물 마무리업 마스터는 500명, 전모공은 수련공을 포함해 3000~5000명 수준을 오갔다.이런 전모공들은 마무리 공정을 통제했고, 조직을 갖추고 비숙련공을 배제했다. 그들은 웨스트라이딩 직물노동자 중 귀족층을 이뤘고, 정식으로 고용되기만 하면 19세기 초반 몇 년간은 주당 30실링이라는 고소득도 가능했다. 전모공은 ‘독립적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에 높은 정치의식으로 유명했다. “맥줏집에서 직조공이나 마무리공, 염색공보다 두세 배의 돈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당대 리즈 머큐리지는 “전모공은 엄밀히 말해 피고용인이 아니다”고 평했다.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룻밤 사이 자신을 노동 엘리트에서 ‘제조업에서 불필요한 신분층’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기계의 위험성도 잘 알았다. 좌파적 시각에서 보면 자본과 노동 간 경쟁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비용 절감 노력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이윤율 저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화는 이 같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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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 수공업 기술자들의 기계파괴운동…영국, 1만2000명 군대병력 투입해 강력 대응

    1811년 영국에선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불린 폭력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랭커셔에선 역직기가 파괴됐다. 요크셔에선 전단기가 부서졌다. 미들랜즈에선 편직기가 박살났다.1811~1817년 발생했던 일련의 기계파괴운동은 영국 내 세 지역, 세 가지 직종에 한정된 운동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811년 11월 노팅엄셔에서 시작돼 이듬해 요크셔의 웨스트라이딩 지역으로 번졌다. 1813년 3월엔 랭커셔까지 기계파괴운동에 동참했다. 영국 정부는 러다이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기간 웰링턴 장군이 이베리아반도에 파견했던 것보다 더 많은 1만2000명의 군대 병력을 투입했다. 또 강력한 법적 처벌로 재발의 싹을 잘랐다.1810년대 러다이트 운동 첫 신호탄은 편직기 편물공들이 쐈지만 사실 기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오랜 역사가 있었다. 출처가 명확하진 않지만 ‘러다이트’라는 명칭도 1799년 두 대의 양말 짜는 기계를 부쉈던 네드 러드라는 노동자의 이름을 훗날 전모공들이 차용한 데서 비롯됐다. 그보다 앞선 1785년 에버레트가 영국 최초의 전모기를 만들자 실업자들은 그 기계를 불태웠고, 5만 명의 노동자가 아크라이트의 방적기계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유럽 대륙에서도 기계파괴운동의 전사라 불릴 만한 일이 적지 않았다. 1630년대 독일 단치히에서는 직물 짜는 기계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계 발명가를 몰래 교살하거나 물에 던져 죽여도 시장이 이를 묵인한다는 말이 돌았다. 기계의 발명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조치였다. 네덜란드 레이덴에서도 레이스 직공들의 폭동으로 시의회가 1629년까지 직물 짜는 기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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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어·말타고 활쏘기 등 고유문화 유지 노력했지만 부정부패와 나태가 좀먹으며 국가 전체가 활력 잃어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국어(만주어)와 기사(말타면서 활쏘기) 그리고 조상들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지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만주족이 고유의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 것이다.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중국 지배의 근간인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만주족의 지배 체제가 확고해진 건륭제 시대가 되면 만주족 기인들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만주족 고유의 방식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이 계속해서 반포됐다. 중국 대륙 정복의 근간이고, 청나라 성공의 DNA였던 군사력의 골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건륭제(사진)는 특히 기마술과 궁술을 중시했다. 말을 탄 상태에서 활 쏘는 기술을 만주족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여겼다. 이 같은 기술이 쇠락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상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건륭제는 “건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기마 상태에서 활을 쏘는 궁술을 매우 중시했다”며 “오래된 관습과 제도는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을 통해 공손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강조에도 만주족의 실상은 그의 의도와 계속해서 멀어져갔다. 당장 주변 인사들부터 필수 코스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건륭제, 기마술·궁술 기본덕목으로 여겨건륭 연간 초기의 저명한 귀족이자 군사지도자로 활동했던 눌친은 티베트 원정에 나섰다가 그만 용렬한 모습만 드러냈다. 그 사실은 건륭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눌친을 북경으로 소환한 건륭제는 중과실과 직무유기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눌친은 1749년 1월 연병장으로 끌려나와 군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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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 회원 자격과 전체 회원수 엄격히 제한…기술 습득 위해 장인 밑에서 숙식하며 청춘 보내

    길드 전체 회원수와 회원권 자격을 주는 것이 엄격히 제한됐다. 특히 동업조합 회원인 장인이 되려면 젊은 청춘은 결혼도 못 한 채 기술 습득에 헌신해야 했다. 장인이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거치던 도제나 수련공은 소정의 수업 기간 또는 일정한 고용 기간 장인의 집에서 머물며 함께 생활해야 했다.이들 수련공은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 신분이었기에 고용주인 장인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독립된 장인이 되기 전엔 장가갈 수 없고 노총각으로 늙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식제’라고 불린 이 제도는 업종별, 시대별, 지역별 편차가 있긴 했다. 장인의 집에 기거하지 않고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수련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건축업종에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수련공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다른 한편으론 장인이 그의 집에서 먹고 자는 도제와 수련공에 대해 기술교육이나 작업의 영역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지시와 통제를 하는 가부장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수공업 기술을 가르치고 기량을 연마하도록 하거나, 고용 기회를 주고 노동의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부모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직업윤리와 명예까지 지도 교육도제와 수련공은 청소년기에 가정과 부모를 떠나 낯선 곳에서 엄격한 장인과 살아야 했다. 장인은 도제와 수련공이 향후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직업윤리와 신분적 명예, 긍지, 예절, 덕목 등을 갖추도록 모범과 훈계를 통해 지도하고 교육했다. 이 같은 전통적인 도제수업에 대해 경제사가 구스타프 슈몰러는 “노동과 교육, 기술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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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 특권에 맞선 '수공업자 조합' 길드…정치참여 늘며 시의원 절반 차지하기도

    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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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곡물값 크게 오르며 사망자 수 전쟁국가 앞질러

    평균 곡물가격은 1738년에서 1740년 사이 60%나 뛰었다. 한번 높아진 곡물가격은 1742년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속됐다. 몇몇 지역에선 곡물 가격이 두 배나 오르기도 했다.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선 1737~1738년보다 1740~1741년 곡물 가격이 77.0% 뛰었다. 덴마크에선 같은 기간 곡물가가 71.4% 올랐다. 핀란드는 67.1%, 스웨덴은 60.0%, 아일랜드는 56.7% 급등했다. 스코틀랜드(52.9%) 독일(47.6%) 노르웨이 (44.1%) 등도 식료품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남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지만 이탈리아(37.2%) 프랑스(35.7%) 오스트리아(33.7%) 잉글랜드(32.9%) 스위스(30.7%) 등도 부담이 급증하긴 마찬가지였다. 곡물가 오르며 저소득층 영양부족이처럼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장기 영양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당시 저소득층이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굶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에선 음식물과 음료 소비에 드는 비용이 가계 전체 수입의 60~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이 같은 곡물가 상승의 여파로 1735~1739년에 비해 1740~1742년의 사망 증가율도 크게 높아졌다. 다만 곡물가 상승률과 사망자 증가율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사망자 수가 81% 늘어난 것을 비롯해 핀란드(51.8%)와 아일랜드(25.3%) 등의 사망률 증가율이 높았다. 프랑스도 사망자가 24.5%나 늘었고 잉글랜드는 23.4% 상승했다. 아일랜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식량 부족 여파로 사망자 증가율이 당시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던 스웨덴(22.7%)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전쟁보다 굶주림이 훨씬 무서운 재앙이었던 셈이다.당시 프로이센, 폴란드,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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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유럽 부흥기에도 농경사회의 한계는 못 피해

    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 ‘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때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시기’로도 불렸다. 최근에는 이 기간을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때로 보기도 한다.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수준으로 높아졌다. 1700년 70~8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 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경제 발전으로 유럽 인구 급증영국을 중심으로 도시화도 빠르게 이뤄졌다. 1600~1800년 영국 인구는 111% 증가했는데 도시 인구 비율은 600%까지 늘었다. 특히 1750~1800년 유럽 도시 인구 증가율의 70%는 영국 몫이었다. 1800년에도 영국 인구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의 도시화 비율 증가 속도가 가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시화 물결은 이 시기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각지로 빠르게 확산됐다.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맬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