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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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말타고 활쏘기 등 고유문화 유지 노력했지만 부정부패와 나태가 좀먹으며 국가 전체가 활력 잃어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국어(만주어)와 기사(말타면서 활쏘기) 그리고 조상들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지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만주족이 고유의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 것이다.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중국 지배의 근간인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만주족의 지배 체제가 확고해진 건륭제 시대가 되면 만주족 기인들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만주족 고유의 방식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이 계속해서 반포됐다. 중국 대륙 정복의 근간이고, 청나라 성공의 DNA였던 군사력의 골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건륭제(사진)는 특히 기마술과 궁술을 중시했다. 말을 탄 상태에서 활 쏘는 기술을 만주족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여겼다. 이 같은 기술이 쇠락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상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건륭제는 “건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기마 상태에서 활을 쏘는 궁술을 매우 중시했다”며 “오래된 관습과 제도는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을 통해 공손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강조에도 만주족의 실상은 그의 의도와 계속해서 멀어져갔다. 당장 주변 인사들부터 필수 코스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건륭제, 기마술·궁술 기본덕목으로 여겨건륭 연간 초기의 저명한 귀족이자 군사지도자로 활동했던 눌친은 티베트 원정에 나섰다가 그만 용렬한 모습만 드러냈다. 그 사실은 건륭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눌친을 북경으로 소환한 건륭제는 중과실과 직무유기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눌친은 1749년 1월 연병장으로 끌려나와 군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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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회원 자격과 전체 회원수 엄격히 제한…기술 습득 위해 장인 밑에서 숙식하며 청춘 보내
길드 전체 회원수와 회원권 자격을 주는 것이 엄격히 제한됐다. 특히 동업조합 회원인 장인이 되려면 젊은 청춘은 결혼도 못 한 채 기술 습득에 헌신해야 했다. 장인이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거치던 도제나 수련공은 소정의 수업 기간 또는 일정한 고용 기간 장인의 집에서 머물며 함께 생활해야 했다.이들 수련공은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 신분이었기에 고용주인 장인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독립된 장인이 되기 전엔 장가갈 수 없고 노총각으로 늙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식제’라고 불린 이 제도는 업종별, 시대별, 지역별 편차가 있긴 했다. 장인의 집에 기거하지 않고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수련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건축업종에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수련공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다른 한편으론 장인이 그의 집에서 먹고 자는 도제와 수련공에 대해 기술교육이나 작업의 영역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지시와 통제를 하는 가부장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수공업 기술을 가르치고 기량을 연마하도록 하거나, 고용 기회를 주고 노동의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부모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직업윤리와 명예까지 지도 교육도제와 수련공은 청소년기에 가정과 부모를 떠나 낯선 곳에서 엄격한 장인과 살아야 했다. 장인은 도제와 수련공이 향후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직업윤리와 신분적 명예, 긍지, 예절, 덕목 등을 갖추도록 모범과 훈계를 통해 지도하고 교육했다. 이 같은 전통적인 도제수업에 대해 경제사가 구스타프 슈몰러는 “노동과 교육, 기술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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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특권에 맞선 '수공업자 조합' 길드…정치참여 늘며 시의원 절반 차지하기도
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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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곡물값 크게 오르며 사망자 수 전쟁국가 앞질러
평균 곡물가격은 1738년에서 1740년 사이 60%나 뛰었다. 한번 높아진 곡물가격은 1742년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속됐다. 몇몇 지역에선 곡물 가격이 두 배나 오르기도 했다.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선 1737~1738년보다 1740~1741년 곡물 가격이 77.0% 뛰었다. 덴마크에선 같은 기간 곡물가가 71.4% 올랐다. 핀란드는 67.1%, 스웨덴은 60.0%, 아일랜드는 56.7% 급등했다. 스코틀랜드(52.9%) 독일(47.6%) 노르웨이 (44.1%) 등도 식료품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남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지만 이탈리아(37.2%) 프랑스(35.7%) 오스트리아(33.7%) 잉글랜드(32.9%) 스위스(30.7%) 등도 부담이 급증하긴 마찬가지였다. 곡물가 오르며 저소득층 영양부족이처럼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장기 영양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당시 저소득층이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굶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에선 음식물과 음료 소비에 드는 비용이 가계 전체 수입의 60~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이 같은 곡물가 상승의 여파로 1735~1739년에 비해 1740~1742년의 사망 증가율도 크게 높아졌다. 다만 곡물가 상승률과 사망자 증가율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사망자 수가 81% 늘어난 것을 비롯해 핀란드(51.8%)와 아일랜드(25.3%) 등의 사망률 증가율이 높았다. 프랑스도 사망자가 24.5%나 늘었고 잉글랜드는 23.4% 상승했다. 아일랜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식량 부족 여파로 사망자 증가율이 당시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던 스웨덴(22.7%)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전쟁보다 굶주림이 훨씬 무서운 재앙이었던 셈이다.당시 프로이센, 폴란드,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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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 부흥기에도 농경사회의 한계는 못 피해
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 ‘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때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시기’로도 불렸다. 최근에는 이 기간을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때로 보기도 한다.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수준으로 높아졌다. 1700년 70~8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 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경제 발전으로 유럽 인구 급증영국을 중심으로 도시화도 빠르게 이뤄졌다. 1600~1800년 영국 인구는 111% 증가했는데 도시 인구 비율은 600%까지 늘었다. 특히 1750~1800년 유럽 도시 인구 증가율의 70%는 영국 몫이었다. 1800년에도 영국 인구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의 도시화 비율 증가 속도가 가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시화 물결은 이 시기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각지로 빠르게 확산됐다.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맬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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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경 부활했지만 농업생산량은 급감 '아이러니'
광해군 이후에는 현종 대에 이를 때까지 친경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다. 친경이 다시 논의된 것은 숙종 대로 남인의 대표 허목이 옛 기록을 근거로 친경의례를 시행하자고 적극 건의한 이후였다. 하지만 친경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마침 천연두가 유행한 탓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친경 당일 큰비가 내려 관경대에 설치된 일월오악도 병풍이 찢어지고 소를 끌고 쟁기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척대자 친경 행사가 연기된 것이다. 다음날 현종 왕릉인 숭릉의 능침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생기면서 친경의례는 아예 무산됐다.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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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직접 쟁기 잡고 밭갈이…백성들 농사일 독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 2년(983) 1월 신미일에 ‘왕이 원구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태조를 배향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달 을해일에는 ‘왕이 몸소 적전(국왕이나 천자가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설정한 의례용 토지)을 갈고 신농씨(神農氏)에 제사 지내면서 후직(后稷: 고대 중국의 관명으로 농사일을 주관하던 장관, 주나라의 시조인 기를 가리킴)을 배향했다. 풍년을 기원하며 왕이 친히 적전을 가는 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고려 성종 때는 왕이 직접 토지를 가는 친경의례뿐 아니라 ‘헌종의식’도 처음으로 거행됐다. 헌종의식이란 ‘왕후가 육궁의 사람을 거느리고 동(늦벼)과 육(올벼) 종자를 싹틔워 임금에게 바친다’는 《주례》의 기록을 근거로 왕후가 올벼의 싹을 틔워 바치는 행사다.성종대에 도입된 이 같은 친경의례를 받들어 이후 일부 왕이 실천에 옮겼다. 1031년(현종 22) 선농에 제사하고 적진을 친경했고, 1048년(문종 2) 후농제를 지냈다. 1134년(인종 12)과 1144년(인종 22)에도 적전을 친경하거나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144년 이후로 왕이 적전에서 밭을 직접 가는 친경례는 거행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통치를 제안할 경우 “적전에서 예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빠지지 않았을 뿐이다. 윤소종(1345~1393)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적전에서 친경의례를 통해 민생을 위한 개혁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왕이 농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취하도록 본격적으로 요구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정도전(1342~1398)은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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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한탕주의가 불러온 금융위기 후 쇠퇴의 길로
사치는 정말로 망국의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변의 요인일까?베네치아나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같은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쇠퇴 원인으로 저명한 경제사가 킨들버거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가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무역 및 생산의 약화,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경쟁에 따른 몰락, 해외시장 독점체제 붕괴, 목재 부족, 흉작, 기상악화 등)과 함께 ‘사치’를 빼놓지 않는다.15세기 피렌체에선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지배층이 고대 전성기 아테네 시민계급처럼 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고 했다. 덕분에 이때는 르네상스기 예술가들의 호황기가 됐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1425년부터 피렌체 세례당의 화려한 동쪽 현관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가 10만 굴덴을 주고 수출항인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이던 해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계획해 완수하도록 위촉받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2의 아테네’로 만들고자 했다.베네치아에선 15세기 갤리선에서 노를 저을 노수를 확보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몰타섬 같은 식민지 출신 사람과 죄수들까지 동원해 갤리선 근무를 시켜야 할 정도로 경제 환경이 급변했다. 오스만투르크에서 노예가 수입된 반면, 탁월한 항해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베네치아 뱃사람들은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피사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는 물론 멀리 영국 함대로까지 일자리를 옮겼다.이 같은 상황에서 베네치아에서 이미 한자리를 차지한 선원들은 흰담비 가죽으로 안을 댄 금색 옷과 같은 정교한 제복을 입기 시작했고, 점점 부패했다. 선원의 임금은 1550년대부터 1590년대까지 두 배로 올랐지만, 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