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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은행업으로 부 쌓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교황청 자금 관리하며 '금융제국 주춧돌' 쌓아

    양모 거래가 급성장하고 고수익을 얻는 동안 피렌체 은행업망은 유럽 전역으로 팽창했다. 1338년 피렌체에는 120만 골드플로린 이상 값어치의 직포를 7~8만 점이나 생산하는 작업장이 200개 이상 있었다. 30년 뒤인 1360년대 말에도 품질은 조야하고 값어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10만 점 이상을 생산하는 작업장이 300개가량 있었다.그러나 성장률이 둔화하고 수익이 하락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전반적으로 피렌체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고급화 쪽에 집중했다. 1338년 훨씬 이전부터 직포 생산량을 줄이고 고품질·고가치 품목에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338~1378년에는 이런 경향이 급속히 심화됐다. 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이전 제품의 두 배 가격인 고품질 직포에만 집중됐다. 그 대신 생산 수량은 2만4000점으로 하락했고, 15세기 전 연간 생산량인 3만 점 이상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에드워드 3세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모직값 폭락피렌체에서의 산업 생산이 이처럼 극적으로 줄어든 것은 어느 누가 폭력적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피렌체의 사업을 이끈 것은 엄격한 자본주의적 행동논리였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수익률을 높이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상품의 구매와 가공, 판매에서 더욱 유연한 투자 형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적 변화상은 1340년대 초 ‘대폭락’이란 충격으로 이어졌다. 이 경제적 충격은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의 프랑스 침공에 돈을 댄 피렌체은행 가문인 바르디와 페루치에서 빌린 136만5000플로린을 갚지 못하겠다고 1339년 선언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의 모라토리엄 규모는 1338년 피렌체 직포 생산 총액보다 많았던 만큼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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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은행 탄생…양모 교역하면서 고도화된 금융업 출현

    근대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고도화된 금융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일궈낸 혁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기반이 마련된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였다. 경제사가들이 중세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평가하는 은행은 이때 등장했다. 1472년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은행이 설립됐다. 시에나에 있는 ‘몬테 디 피에타’도 그때 만들어진 현존하는 장수 금융기관 중 하나다. 이를 직역하면 ‘자비의 산’이 되지만 실제 기능은 전당포라고 할 수 있다. 유로존 재정위기로 2012년 무디스에 의해 신용등급이 강등된 현존 세계 최고의 은행 ‘몬테 데이 파스치 디 시에나’도 이때 설립됐다. 모두 ‘몬테’라는 이름이 조직명에 들어가 있다.기독교인들 사이에 대출이 금지되던 시대에 탁발수도회는 유대인들의 돈놀이를 추방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골고다 언덕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를 본받아 재산의 일부를 기증해 자비의 돈 산을 쌓으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저당잡힐 물건을 들고 오면 그 물건 가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빌려주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이후 무이자대출이나 소액대출도 시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선만 해주면 가만히 앉아서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이 ‘자비의 산’은 꼭 자비롭지만은 않은 수단으로 악용됐다. 가톨릭은 돈 밝히는걸 중죄로 꼽아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거운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가톨릭교회는 돈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거운 중죄로 꼽았다. ‘자비의 산’이라는 출구는 “부자는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규정했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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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의 손·발이자 세습재산의 핵심 '노비'…'乙' 노비 이탈은 '甲' 양반의 경제에 타격

    “(노비인) 송노 분개 복지 등에게 율무밭의 제초를 하게 하고 좁쌀 밭의 김매기도 시켰다. 그런데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좁쌀 밭의 제초를 다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율무밭 둑에 (다른 노비인) 한복을 시켜 찰수수 한 되의 종자를 심게 했는데, 겨우 한 두둑을 심었을 뿐이다. 그나마 그 싹도 듬성듬성 자랐다. 필시 한복이 그 종자를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도대체 우리 집 전답은 모두 한복이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드문드문 파종을 했다. 생각건대 이 종자도 한복이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분통이 난다.”임진왜란 당시 양반이었던 오희문이 전란 사실을 기록한 피란일기 ‘쇄미록’에는 당시 사회의 갑이라 할 수 있는 양반과 전형적인 을인 노비 간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 적지 않다. 오희문이 남긴 1595년 5월 18일 일기의 한 구절도 그렇다. 노비는 인격적으론 자유가 없었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면서 주인의 곡식 종자를 몰래 빼내 자신의 밭에 심었다. 증거가 없는 주인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만년 을로 갖가지 궂은 일에 동원됐던 노비가 갑에게 소심하면서도 확실한 복수를 한 셈이다. 게으르고 부정한 노비 때문에 속 태우는 양반‘쇄미록’ 곳곳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은 효율이 낮았다. 또 직접 상거래에 나서지 못하는 양반들이 시장에서 노비를 거쳐 물건을 사고팔 때 중간에 새는 물건도 적지 않았고, 가격을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조선 전기 양반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원천은 노비와 토지에서 파생되는 수입이었다. 토지 경작에는 노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고려 말 노비 몸값, 소·말보다 못해…조선시대 매매 제한하자 가치 뛰어

    조선시대 노비는 말이나 소보다 못한 몸값이 매겨졌다. 노비의 몸값은 당대 법전들에 담긴 규정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경국대전》의 <호전·매매한>조에는 토지와 가사(家舍) 매매에서 거래를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후 15일로 정했다. 그리고 본문에 주를 달아선 ‘노비도 이와 같다’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노비 거래 항목이 소와 말의 매매한(賣買限)과 같은 조목에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노비의 처지가 마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볼 때 ‘사람의 가격이 마소의 가격보다 훨씬 못했다’고 지적했다.그나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몸값이 조금 올랐다. 노비를 토지에 결박하기 위해 노비 매매를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으로서 값어치를 평가받지 못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성종 7년(147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각종 노비의 가치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여기선 15~16세기 초 장년 노비 한 사람의 가격이 저화 4000장이었다고 한다. ‘저화 20장=면포 1필’로 환산할 경우, 노비 가격은 면포 200필에 해당한다. 이는 조선 초 기록인 《태조실록》 7년 6월 기미조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노비의 몸값에 비해선 적잖이 오른 셈이었다. 1398년 노비의 값은 많이 잡아도 오승포 150필로 말 한 마리(400~500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이후 조선 왕조가 안정되면서 노비의 값은 15~40세는 400필로, 14세 이하 40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됐다고 하니 노비 몸값은 어느 정도 상승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말에 비해선 훨씬 낮았다. 성별로는 남자인 노(奴)가 여자인 비(婢)보다 쌌다.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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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 소액 거래에 반드시 동전만 사용하게…시전 상인 동전 안 쓰면 장 100대·가산 몰수

    종이 화폐가 종이 조각이 돼 버리면서 동전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1425년 전국 폐사(廢寺)와 각 도에서 거둬들인 동을 원료로 하는 주전 사업이 이어졌다. 동전 1문의 가치를 미 1승으로 해 기존 저화와 달리 소액 거래에도 쓸 수 있게 했다. 동전 전용 유통 방침을 정해 저화 1장을 동전 1문의 비율로 교환하기도 했다.동전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시전의 부상대고(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하는 상인)나 다양한 공장 가운데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게 장 100대, 가산 몰수 등을 규정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일상적인 두승 이하 소액 거래에도 반드시 동전만 쓰도록 했다.하지만 동전 사용이 공포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425년 5월에 시중의 백성들은 동전 이용을 기피했다. 동전가도 하락해 미 1승에 전 3문으로 거래되는 지경이 됐다. 최초 화폐 발행 3개월 만에 화폐가치가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동전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전을 녹여 동그릇을 제작하는 자도 늘었다.원활한 동전 유통을 위한 구리 채굴 양도 부족했다. 동전 통용이 결정된 뒤 전국적으로 동광산 개발이 추진됐지만 산출량이 미미했다. 1427년(세종 9)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3개월간 채굴한 동의 양이 300근에 불과했던 반면 이듬해 정월 일본 사신이 한번에 가져온 동철은 2만8000근에 달했다. 동전가격 하락하고 구리 채굴 양도 부족해결국 1445년 10월에 동전도 포기하고 저화를 다시 사용하는 방침을 강구하면서 세종의 동전 유통 실험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구리 채광은 무기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했다.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도 건국 초기부터 주요 국정 과제였다. 건국과 함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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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했던 조선초기…비단은 중국·금은 일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1394년 집필한 《조선경국전》에서 장인과 상인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아닌 ‘부차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또 상공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농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생겨선 안 된다는 유학사상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실제 조선은 정도전의 구상처럼 ‘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모시와 비단의류, 신발, 가구, 부엌가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적인 장인은 언제나 소수였다. 제철과 야금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했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중앙정부 고용 장인 숫자 6600명 제한지방에선 노동 분화가 별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장인이 무기, 농기구, 종이, 베개 등을 생산했다. 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했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상도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감영에는 12명 안팎의 ‘많은’ 장인이 배속됐다.조선은 건국 초부터 비단산업을 증진하려고 했지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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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힐 굽 높이가 여성의 계급 드러내…프랑스 귀부인들은 16㎝ 킬힐 신기도

    여성들의 지위가 하이힐 높이로 구분되던 시대가 있었다. 신발의 높이만 봐도 신을 신은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고, ‘천한 것’들은 감히 높고 세련된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하이힐은 16세기까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17세기 초가 돼서야 서서히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이힐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우선 스페인의 무어인 여성들이 신었던, 목재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힐의 선구로 여겨진다. 이어 물림쇠로 채우게 된 신의 굽이 이탈리아에서 유행했고, 나무신이란 뜻의 ‘조콜리’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이 신은 인기가 좋았는데, 특히 높은 굽의 신발이 인기를 끈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진흙과 쓰레기, 대변 등으로 지저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신은 이 같은 실용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에서 더 주목을 받고, 그것이 사용 이유가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위엄 있는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거리에 진흙탕이 없을 때도 여자들은 하이힐을 계속 신었고, 하이힐이라는 게 치마 밑에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인 만큼 키높이 구두처럼 애용됐다. 키 크게 보여서 위엄있는 인상 풍겨힐의 모양도 투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으로 점차 변해갔고 여자들 간의 ‘구분 짓기’에 따라 힐의 모양도 세분됐다. 소시민이 신는 투박한 굽과 귀부인이 신는 신의 굽이 달랐고, 매춘부들이 신는 굽은 모양이 또 구분됐다. 특히 매춘부들은 결코 성큼성큼 걷는 법 없이 언제나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수도 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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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검귀족·법복귀족…신흥 귀족 늘어나자 대대손손 '귀족 혈통' 증명하는 족보 집착

    서양 역사에서 귀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귀족의 어원이 된 라틴어 노빌리스(nobilis)는 ‘고귀한’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노빌리스란 단어가 ‘고귀한’이라는 뜻 외에 ‘평판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을 가름하는 기준은 자명해진다. 바로 평판이 좋은 집단을 가리켰던 것이다.귀족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선 귀족의 혈통과 미덕은 물론 ‘귀족다운 삶’의 방식을 좇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상업을 포기하고, 검을 차고,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사용하고, 이웃의 혈통 좋은 다른 귀족과 친교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없이 말이 근거가 되는 평판을 통해 귀족과 귀족이 아닌 것이 구분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불명확했고 손쉽게 귀족을 참칭하는 게 가능해졌다. 귀족의 일원이 되면 다른 계층에겐 허락되지 않던 특권과 기회의 문이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수요는 끝이 없었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귀족에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귀족을 자처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 최고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특권 누리기 위해 귀족 자처하는 경우 급증영국의 울지 추기경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 크롬웰 등이 한미한 출신에서 귀족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였다. 그레이셤 가문, 세이무어 가문, 더들리 가문, 세실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