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영국과 프랑스의 투기광풍 (下)
'버블카드'와 존 로                                                                         
출처=위키피디아
'버블카드'와 존 로 출처=위키피디아
자신의 투자수익률을 확인하기 위해 백작과 공작, 백작 부인, 자작 부인 등이 매일 존 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로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몰리면서 희망자의 10분의 1도 로를 보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30분만 기다려도 난리가 났을 고관대작들이 로와 잠시 환담을 나누기 위해 6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로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술 한 모금이나 유리구슬 세 개를 받고 금덩어리를 통째로 내주는 팸플릿 광고로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실상 프랑스 파리의 투자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더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서방회사는 오늘날 루이지애나 등 미국 8개 주에 해당하는 지역의 상업권과 채광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지역 토지는 당시 프랑스 내 토지처럼 부가가치가 크지 않았다. 말라리아가 기승하는 늪지대였던 탓에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고, 기대했던 엄청난 규모의 광맥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지 소유권은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는 만큼의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존 로는 화폐의 본질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라고 믿었고, 프랑스 절대왕정이 그 같은 절대적 신뢰를 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서방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했고, 존 로와 왕실은행은 화폐 발행을 통해 서방회사 주가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무너졌다. 1720년 10월 1만8000리브르에 달했던 주가는 순식간에 40리브르 수준까지 떨어졌다. 1720년 프랑스 국민에겐 엄청난 투자 손실을, 정부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긴 채 은행과 회사 모두 문을 닫았다.

존 로는 베네치아로 도망가 극도의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볼테르는 이 사태를 보고 “국민 절반이 종이 공장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했단 말이냐”며 한탄했다. 몽테스키외 역시 “6주 전만 해도 부유했던 사람들이 모두 빈털터리가 됐다. 존 로는 재단사가 외투를 뒤집듯 나라를 뒤집었다"고 거들었다.

존 로의 무모한 시도 덕에 프랑스인들은 지폐와 주식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됐고, 이후 프랑스가 은행업과 주식시장 발전에서 이웃 유럽 국가에 비해 뒤처지는 원인이 됐다. 그는 당대인들에겐 아무 쓸모도 없는 종잇조각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폐와 금융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끈 존 로에 대해선 단순한 사기꾼을 넘어선 평판이 주어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악당이나 미친놈이 아니라는 평이 나왔다. 다른 사람을 속인 사기꾼이라기보다 스스로 속임당한 비운의 인물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 화폐정책의 본질을 이해했던 금융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다. 마르크스는 그를 두고 “사기꾼과 선각자의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했고, 앨프리드 마셜은 “매혹적인 천재”라고 불렀다. 슘페터는 존 로를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탁월한 재능과 심오한 지식체계로 경제학을 이해한 일류 화폐 이론가”라고 칭했다. 그는 ‘양적완화(monetary easing)’ 정책을 경제 촉진의 수단으로 실행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는 평도 듣는다. 돈의 공급이 부족하면 더 많은 돈이 발행돼야 한다고 처음으로 믿은 인물이 존 로였다. 더 많은 돈이 발행되면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이 촉진될 뿐 아니라 군주의 사업체들을 대중에게 매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막대한 부채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시나리오였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면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고, 국가는 성장하고, 제조업은 발전하고, 국내외에서 무역이 지속되면서 부와 권력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진정한 부이자 궁극적인 가치의 저장고로 여겨졌던 금과 은 대신에 무역의 순환에서 윤활유로 작동하는 돈의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다만 그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발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각종 금융 사고가 잊을 만하면 반복적으로 터지곤 한다. 각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는 다를지 모르지만, 300여 년 전 영국과 프랑스가 겪었던 금융 사고와 금융·자본시장을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 투자자들의 행태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프랑스가 은행업과 주식시장 발전에서 이웃 유럽 국가들에 뒤처진 원인을 본문에서 찾아보자.

2. 양적완화 정책은 언제 시행하며,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학습해보자.

3. 프랑스 왕실은행을 설립했던 존 로는 어떤 인물인지 조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