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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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론 아닌 문학적 수사로 재정정책 설명 '눈길'
케인스(사진)의 유명한 <일반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미없는 책이다. 책의 원제목 역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장황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따분하고, 웬만해선 책꽂이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성격의 책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 구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유효수요’ 창출과 관련된 구절로, 신기하게도 케인스는 이 부분에선 화폐나 이자율 같은 각종 금융 관련 얘기나 수학공식이 아니라 마치 고대의 예언가가 된 듯 문학작품이 연상되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케인스의 표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어불성설의 결론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낭비적인 형태보다도 오히려 완전히 낭비적인 개입 지출의 형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금광으로 알려진 땅 한가운데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선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을 가져올 뿐인데도 모든 해결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케이스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광에 적당한 깊이로 묻고, 그 다음에 탄광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은 뒤 자유방임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이 다시 파내게 한다면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 반작용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선 그 자본적 부도 또한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물론 가옥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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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공황 키운 것은 글로벌 리더십 실종 때문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뒤흔든 대사건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꼽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설명이 엇갈린다.경기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실물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화폐 요인 때문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기원이 미국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를 놓고도 논박을 거듭했다. 1920년대 기술 발전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 도입과 대규모 실업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글로벌 경제가 동시에 대혼돈에 빠지게 된 치명적 약점이 국제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에 있는지, 단순히 운영상 실수였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대공황의 원인을 짚은 경제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급 거장들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미국 금융정책 원인설(밀턴 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라이어널 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존 메이너드 케인스), 장기 정체설(앨빈 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잉바르 스베닐손) 등 ‘한가락’ 한다는 경제학자들은 한마디씩 경제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찰스 P 킨들버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주장이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대공황 발생 당시 글로벌 지도력 부재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1929년 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이었던 이유로 국제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안정의 배경에는 글로벌 정치 리더십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와 관련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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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돈값 추락…우표 사는 데 아파트 살 돈 필요
역사적으로 독일은 돈이 휴지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라다. 그 여파로 유럽 재정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지만 독일은 여전히 물가 상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돈 풀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을 위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했고, 정부가 세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예상으로 민간자본의 해외 도피가 발생하면서 화폐가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 1918년 12월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됐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어 1923년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 마르크가 필요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기의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당시 달러 대비로 마르크화 가치 추이를 복기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인 파피어마르크가 종이(파피어)라는 이름처럼 휴지 조각이 돼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달러당 4.2마르크였던 마르크화 가치는 전쟁 이후 달러당 8.9마르크로 떨어졌고, 1920년 달러당 14마르크가 됐다. 불과 1년 뒤에는 달러당 64.8마르크로 하락한 뒤 1922년엔 달러당 191.8마르크로 추락했다. 1923년에는 ‘천문학’에서 쓰일 법한 단위들이 동원된다. 1923년 1월 7260마르크에서 4월 2만 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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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백화점들 활황…외제 사는 조선인 수두룩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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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황기 102층 설계…대공황 여파로 '공실' 고통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장밋빛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던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내수 소비가 급증했다. 1920년대 미국 공업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1920년대에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는 범용제품이 됐다. 1914년 자동차 생산은 126만 대 수준이었지만 1929년이 되자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560만 대를 생산해냈다. 1927년 포드자동차의 히트 모델 ‘모델T’는 1500만 대나 판매된 뒤 단종됐다. 1918년 3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됐던 캐나다에선 1929년까지 190만 대의 자동차가 보급됐다. 자동차산업은 철강, 고속도로, 모텔, 중고차 시장 등 다양한 2차시장을 창출했다. 정유, 유리, 철강, 고무산업은 덩달아 발전했다. 1925~1929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18만3877개에서 20만6663개로 늘었다. 이들 업체의 생산액은 약 6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커졌다.이 시기 라디오도 보급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라디오를 가진 가정은 흔치 않았지만 1929년에는 미국 내에서 1000만 가구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했다. 유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대체했다. 화학산업도 정점을 이뤘다. 대형 백화점들은 지점을 계속 늘렸고, 통신판매 같은 새로운 유통 방법이 개발됐다. 개인 소득 증가에 따라 당시 하이테크 전자산업이던 냉장고와 세탁기 등 전자제품 소비도 급증했다. 백화점의 고가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월가는 1923년 발생한 순간적인 조정기를 빼곤 1922~1929년까지 초호황을 누렸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전비 마련을 위해 공모한 ‘자유채권’에 참여해 짭짤한 재미를 봤던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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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이 백의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민족은 역사 이래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신화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 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최공호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백의민족’ 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색채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나온 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흰옷 착용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특질이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 빈번하게 발견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에 “부여인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1487년 조선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동월의 저술인 조선부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한민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포착됐다.이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백색 패션을 선호해서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적지 않은 문헌에서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는 점이다. 19세기 충청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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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서 태어나면 차별…본국 출산 강행
19세기 말 영국에선 원정 출산이 성행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이었지만 각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에서 관료로 봉직한 ‘있는 집’ 부인들은 애를 낳기 위해 오랜 뱃길과 불편한 철로를 마다하지 않고 애를 낳으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특히 영국의 대표 식민지인 인도에 파견 근무하는 고위공직자들의 부인은 지체가 높을수록 아기 출산 시기에 맞춰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가까운 친척이나 자신의 성 혹은 영지에서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장차 태어날 아기의 출생지가 인도가 아니라 영국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모두 자식을 ‘2등 국민’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유대인의 경우 더 심각해서 당시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대인은 부모가 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더라도 외국인으로 간주돼 땅을 구입할 수도 없었고 식민지 교역에서 배제됐다. 뿐만 아니라 영국 상인에 비해 두 배의 세금을 내야 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유대 상인들은 임신한 부인을 영국으로 원정 출산 보내 영국 시민권을 얻도록 했다고도 전해진다.하지만 모든 식민지 거주 영국인이 본국으로 원정 출산을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론 식민지 출생이란 차별을 떨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본국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정책을 찬양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매진하는 인물도 등장했다.대표적 인물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다. 190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키플링은 우리에겐 <정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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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경제성장률 유럽에서 가장 높아
철도 발달에 따른 수혜에서 보헤미아 지역은 빠지지 않는다. 페트르 초르네예와 지르지 포코르니 등 체코 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이미 보헤미아 지역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산업지대가 됐다. 국내외 철도 네트워크를 통한 경제 통합의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비트코비체 철강사나 필젠에 있던 스코다작업소, 브라우하우스 같은 기업들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오스트라바, 클라드노(휘텐베르크와 콜베르크바우사의 거점)를 비롯해 기계공업의 중심지였던 브륀, 유리공업에서 강점을 보였던 북부 보헤미아,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던 동북부 보헤미아 지역 등 보헤미아 전 지역이 비교적 골고루 산업화의 수혜를 입었다.그 결과 합스부르크제국 내 체코인들의 영역은 전체 토지의 26.4%에 불과했지만 제국 전체 인구의 35%를 체코인이 차지할 정도로 보헤미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인구 밀도 역시 1854년 ㎢당 84명에서 1880년에는 104명으로 늘었다. 1910년에는 ㎢당 128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현재 오스트리아 지역 인구밀도인 ㎢당 95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된 징표로 해석됐다. 체코지역에서 인구 1만 명 이상 도시는 1880년 38개에서 1910년 77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체코 도시인 숫자는 80만 명에서 1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19세기 후반 지역 간 통합이 강화되면서 상품 가격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자율과 임금 수준도 평준화돼갔다. 당시 인도 곡물가의 지역별 편차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컸고, 국가 내 이자율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이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심했다는 국제비교도 곁들여졌다.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