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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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남미에서 금과 은 대규모로 들여왔지만…대부분 사치품 구입과 화려한 건물 짓는데 사용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흥청망청 들여온 금과 은 덕분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고, 최고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귀금속의 유입은 스페인 경제를 한 단계 비약시킬 수 있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은의 대량 유입으로 스페인에 형성됐던 상업과 산업발전에 적합한 여건은 1550년대를 넘어서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스페인이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썼음에도 스페인에 유입된 은은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펠리페 2세 궁정의 재무관은 “마치 스페인이 서인도제도의 조그만 나라인 것처럼 은이 유출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스페인을 빠져나간 은은 빌바오를 통하든지 아니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거쳐 앤트워프나 잉글랜드 등 북부 유럽 지역으로 흘러갔다.그나마 쓸 수 있는 방대한 자원도 생산적인 곳에 투입되지 못했다. 대부분 부질없는 대외 전쟁 비용이나 대외 교육 수지 적자를 보전하는 데 쓰였다. 사치품을 사거나 허영을 반영한 건물을 짓는 데도 큰 돈이 쓰였다. 이렇게 된 원인으론 스페인이 제조업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였다기보다는 원재료를 수출하는 경제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식량 구입도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이 시대 스페인에서 중산층이 매우 희박했다는 점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카스티야 지역에서 일부 양모 거래 등으로 성장한 상인 계층이 있었지만 시몬 루이스 같은 일부 예외적인 상인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상업세력이 크게 미약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 가문 중 시몬 루이스보다 더 큰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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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남미에서 은이 대규모로 유입…16세기 유럽 물가는 4배 가까이 상승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서 먹기를 원한다.”남미 대륙 상부페르(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 은광에서 대규모 은이 유입된 이후 스페인 경제는 대격변을 맞이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외교관이었던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몸을 누일 여인숙도 찾기 힘들고,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없던 빈 땅’으로 묘사했던 이베리아반도의 풍경은 100년 사이 급격히 변했다. 역사학자들이 최초의 ‘가격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1501년부터 1600년까지 16세기 한 세기 동안 유럽의 물가는 4배 가까이 올랐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1.4% 정도니 현대인의 시선에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당대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스페인 전체적으로는 1500년대 전반기에 두 배 넘게 올랐다. 1510년대와 1530년대, 1550년대에 특히 많이 뛰었다. 1560년대부터는 물가가 꾸준히 상승했다. 다만 1551~1556년, 1562~1569년, 1584~1596년이 상대적으로 안정기였다. 1596년부터는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해 1601년에는 1571~1580년에 비해 143.55% 상승했다. 결론적으로 1600년이 되면 1501년에 비해 4배나 오른 셈이다. 이후 물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1637~1642년에는 신대륙 은 유입 급감 여파로 오히려 일부 물가가 떨어진다. 하지만 16세기 급등한 상태를 기반으로 물가는 과거처럼 싸지지 않게 된다.구체적으로 물가혁명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유럽 대륙의 물가가 본격적으로 들썩이기 시작한 것은 1535년께부터다. 일반적으로 서인도제도 무역 독점권을 쥐고 있어서 은의 유입 1번지로 꼽혔던 안달루시아의 물가가 가장 많이 올랐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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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수만 늘린 18세기 중국 토지 상속제도…산업화 늦추고…농촌에 '가난 족쇄' 채워
전통시대 중국 농촌사회에선 여아 살해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갓 태어난 여아들을 말 그대로 접시 물에 코를 박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구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이 적었다.사회에서 여성이 줄어든 피해는 고스란히 빈곤층 농촌 노동자에게 집중됐다. 부유한 지주와 상류층은 첩까지 두고 살았지만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었던 가난한 농촌 총각들에겐 장가 갈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던 것이다. 한마디로 혼인 적령기의 여성들은 이들 반(半) 프롤레타리아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다.그 결과 농촌 총각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2세를 재생산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 농촌사회에서 밑바닥을 차지하는 농촌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줄어들기는커녕 아무런 문제 없이 지속적으로 공급됐다. 이는 그들보다 나은 조건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하향 이동하면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된 원인으로 필립 황을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은 인류학 연구에서 차용한 ‘인볼루션(invoiution)’이란 개념을 내세운다. ‘내권화(內捲化)’라는 용어로 번역되는 인볼루션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퇴화하는 현상을 말한다.18세기까지 전통시대 중국은 농촌 가내수공업이 상당한 발전을 거두면서 유럽 못지않은 경제적 융성을 누렸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인 공장제 산업화로는 도약하지 못했다. 원시산업화 수준에서 멈춰선 채 그 자리를 맴맴 돌았던 것이다.넘쳐나는 인구를 바탕으로 한 싼 노동력을 통해 인구당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 아니라 토지 단위면적당 생산성을 향상하는 길을 모색했다. 강력한 인구압(人口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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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으로 부 쌓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교황청 자금 관리하며 '금융제국 주춧돌' 쌓아
양모 거래가 급성장하고 고수익을 얻는 동안 피렌체 은행업망은 유럽 전역으로 팽창했다. 1338년 피렌체에는 120만 골드플로린 이상 값어치의 직포를 7~8만 점이나 생산하는 작업장이 200개 이상 있었다. 30년 뒤인 1360년대 말에도 품질은 조야하고 값어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10만 점 이상을 생산하는 작업장이 300개가량 있었다.그러나 성장률이 둔화하고 수익이 하락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전반적으로 피렌체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고급화 쪽에 집중했다. 1338년 훨씬 이전부터 직포 생산량을 줄이고 고품질·고가치 품목에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338~1378년에는 이런 경향이 급속히 심화됐다. 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이전 제품의 두 배 가격인 고품질 직포에만 집중됐다. 그 대신 생산 수량은 2만4000점으로 하락했고, 15세기 전 연간 생산량인 3만 점 이상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에드워드 3세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모직값 폭락피렌체에서의 산업 생산이 이처럼 극적으로 줄어든 것은 어느 누가 폭력적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피렌체의 사업을 이끈 것은 엄격한 자본주의적 행동논리였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수익률을 높이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상품의 구매와 가공, 판매에서 더욱 유연한 투자 형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적 변화상은 1340년대 초 ‘대폭락’이란 충격으로 이어졌다. 이 경제적 충격은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의 프랑스 침공에 돈을 댄 피렌체은행 가문인 바르디와 페루치에서 빌린 136만5000플로린을 갚지 못하겠다고 1339년 선언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의 모라토리엄 규모는 1338년 피렌체 직포 생산 총액보다 많았던 만큼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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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은행 탄생…양모 교역하면서 고도화된 금융업 출현
근대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고도화된 금융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일궈낸 혁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기반이 마련된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였다. 경제사가들이 중세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평가하는 은행은 이때 등장했다. 1472년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은행이 설립됐다. 시에나에 있는 ‘몬테 디 피에타’도 그때 만들어진 현존하는 장수 금융기관 중 하나다. 이를 직역하면 ‘자비의 산’이 되지만 실제 기능은 전당포라고 할 수 있다. 유로존 재정위기로 2012년 무디스에 의해 신용등급이 강등된 현존 세계 최고의 은행 ‘몬테 데이 파스치 디 시에나’도 이때 설립됐다. 모두 ‘몬테’라는 이름이 조직명에 들어가 있다.기독교인들 사이에 대출이 금지되던 시대에 탁발수도회는 유대인들의 돈놀이를 추방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골고다 언덕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를 본받아 재산의 일부를 기증해 자비의 돈 산을 쌓으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저당잡힐 물건을 들고 오면 그 물건 가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빌려주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이후 무이자대출이나 소액대출도 시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선만 해주면 가만히 앉아서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이 ‘자비의 산’은 꼭 자비롭지만은 않은 수단으로 악용됐다. 가톨릭은 돈 밝히는걸 중죄로 꼽아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거운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가톨릭교회는 돈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거운 중죄로 꼽았다. ‘자비의 산’이라는 출구는 “부자는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규정했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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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손·발이자 세습재산의 핵심 '노비'…'乙' 노비 이탈은 '甲' 양반의 경제에 타격
“(노비인) 송노 분개 복지 등에게 율무밭의 제초를 하게 하고 좁쌀 밭의 김매기도 시켰다. 그런데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좁쌀 밭의 제초를 다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율무밭 둑에 (다른 노비인) 한복을 시켜 찰수수 한 되의 종자를 심게 했는데, 겨우 한 두둑을 심었을 뿐이다. 그나마 그 싹도 듬성듬성 자랐다. 필시 한복이 그 종자를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도대체 우리 집 전답은 모두 한복이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드문드문 파종을 했다. 생각건대 이 종자도 한복이 훔쳐 자기 밭에 뿌렸을 것이다. 분통이 난다.”임진왜란 당시 양반이었던 오희문이 전란 사실을 기록한 피란일기 ‘쇄미록’에는 당시 사회의 갑이라 할 수 있는 양반과 전형적인 을인 노비 간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 적지 않다. 오희문이 남긴 1595년 5월 18일 일기의 한 구절도 그렇다. 노비는 인격적으론 자유가 없었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면서 주인의 곡식 종자를 몰래 빼내 자신의 밭에 심었다. 증거가 없는 주인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만년 을로 갖가지 궂은 일에 동원됐던 노비가 갑에게 소심하면서도 확실한 복수를 한 셈이다. 게으르고 부정한 노비 때문에 속 태우는 양반‘쇄미록’ 곳곳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은 효율이 낮았다. 또 직접 상거래에 나서지 못하는 양반들이 시장에서 노비를 거쳐 물건을 사고팔 때 중간에 새는 물건도 적지 않았고, 가격을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조선 전기 양반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원천은 노비와 토지에서 파생되는 수입이었다. 토지 경작에는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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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노비 몸값, 소·말보다 못해…조선시대 매매 제한하자 가치 뛰어
조선시대 노비는 말이나 소보다 못한 몸값이 매겨졌다. 노비의 몸값은 당대 법전들에 담긴 규정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경국대전》의 <호전·매매한>조에는 토지와 가사(家舍) 매매에서 거래를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후 15일로 정했다. 그리고 본문에 주를 달아선 ‘노비도 이와 같다’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노비 거래 항목이 소와 말의 매매한(賣買限)과 같은 조목에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노비의 처지가 마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볼 때 ‘사람의 가격이 마소의 가격보다 훨씬 못했다’고 지적했다.그나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몸값이 조금 올랐다. 노비를 토지에 결박하기 위해 노비 매매를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으로서 값어치를 평가받지 못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성종 7년(147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각종 노비의 가치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여기선 15~16세기 초 장년 노비 한 사람의 가격이 저화 4000장이었다고 한다. ‘저화 20장=면포 1필’로 환산할 경우, 노비 가격은 면포 200필에 해당한다. 이는 조선 초 기록인 《태조실록》 7년 6월 기미조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노비의 몸값에 비해선 적잖이 오른 셈이었다. 1398년 노비의 값은 많이 잡아도 오승포 150필로 말 한 마리(400~500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이후 조선 왕조가 안정되면서 노비의 값은 15~40세는 400필로, 14세 이하 40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됐다고 하니 노비 몸값은 어느 정도 상승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말에 비해선 훨씬 낮았다. 성별로는 남자인 노(奴)가 여자인 비(婢)보다 쌌다.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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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소액 거래에 반드시 동전만 사용하게…시전 상인 동전 안 쓰면 장 100대·가산 몰수
종이 화폐가 종이 조각이 돼 버리면서 동전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1425년 전국 폐사(廢寺)와 각 도에서 거둬들인 동을 원료로 하는 주전 사업이 이어졌다. 동전 1문의 가치를 미 1승으로 해 기존 저화와 달리 소액 거래에도 쓸 수 있게 했다. 동전 전용 유통 방침을 정해 저화 1장을 동전 1문의 비율로 교환하기도 했다.동전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시전의 부상대고(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하는 상인)나 다양한 공장 가운데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게 장 100대, 가산 몰수 등을 규정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일상적인 두승 이하 소액 거래에도 반드시 동전만 쓰도록 했다.하지만 동전 사용이 공포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425년 5월에 시중의 백성들은 동전 이용을 기피했다. 동전가도 하락해 미 1승에 전 3문으로 거래되는 지경이 됐다. 최초 화폐 발행 3개월 만에 화폐가치가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동전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전을 녹여 동그릇을 제작하는 자도 늘었다.원활한 동전 유통을 위한 구리 채굴 양도 부족했다. 동전 통용이 결정된 뒤 전국적으로 동광산 개발이 추진됐지만 산출량이 미미했다. 1427년(세종 9)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3개월간 채굴한 동의 양이 300근에 불과했던 반면 이듬해 정월 일본 사신이 한번에 가져온 동철은 2만8000근에 달했다. 동전가격 하락하고 구리 채굴 양도 부족해결국 1445년 10월에 동전도 포기하고 저화를 다시 사용하는 방침을 강구하면서 세종의 동전 유통 실험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구리 채광은 무기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했다.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도 건국 초기부터 주요 국정 과제였다. 건국과 함께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