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20세기에 자행된 약탈경제 '전쟁'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한 장면.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한 장면.
일본 혹은 일본인이라고 하면 보통 철저한 준비와 분석 등이 연상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큰일’을 저질렀다. 전쟁 상대마저도 자신들이 석유, 철강, 중기 등 필수전쟁 수행 물자 수입을 가장 크게 의존했던 미국을 선택하는 우를 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력과 물자는 계속 모자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무리수는 또 다른 무리수를 불렀다.

태평양 전쟁 개시 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소위 ‘대동아공영권’으로 한데 묶고자 했다. 이는 1920년대 말 육군 장교들이 구상했던 대규모 자급자족적 경제연합체 수립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1942년 11월 대동아(大東亞)를 창설해 점령지역 정부와 원활하게 협상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상은 현지의 일본군이 장악해버렸다. 1943년 일본 천황이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대동아지도대망’이란 계획은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베스(뉴기니)를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한다”고 명시했다.

일본은 점령지역 인력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형태로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일본군은 또 점령지에서 군사 활동을 위한 물자 조달 원칙으로 ‘현지 조달주의’를 택했다. 석유, 주석, 고무 등과 같은 주요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한, 사실상의 자원 수탈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점령지에서 식량 공출과 약탈로 이어졌다. 식량을 빼앗긴 현지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북부 베트남에선 일본군의 강제 식량 징발로 1944년 말에서 1945년까지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이 같은 현지 조달주의 원칙은 일본군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으로 갈수록 동남아시아 정글에 투입된 일본군들은 약탈할 식량조차 없는 상황에서 굶어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미얀마 정글에서 치러진 임팔(Imphal) 전투가 대표적 사례다. 무능한 지휘관의 대명사 무타구치 렌야 장군이 이끈 일본군 6만5000명 중 5만 명이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은 대부분 기아와 질병에 따른 아사였다. 무타구치 장군은 밀림 지대로의 자동차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현지에서 소를 조달해 짐을 옮긴 뒤 소를 식량으로 쓰면 된다”는 ‘칭기즈칸 작전’을 주장했지만 소를 먹일 풀도 없고, 동남아 소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발상은 실전에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점령지역 인력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시스템도 오래 지탱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일본군이 장악했던 동남아 지역에선 거의 400만 명에 가까운 노무자가 동원됐다. 자바섬에서만 30만 명이 공출돼 그중 7만 명이 강제노역 도중 죽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타이~미얀마 간 철도 건설에는 6만여 명의 연합군 포로와 노무자 20만 명이 동원됐다. 그중 연합군 포로 1만2000명을 포함해 7만4000명이 희생당했다.

동남아를 비롯해 일본군이 점령한 각 지역에서 젊은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폭력 대상이 됐다. 1942년 6월 일본 육군회의에선 중국을 포함한 ‘대동아공영권’ 영역 내에 400개의 위안소가 설치됐다고 보고됐다. 위안부 여성으론 조선인과 타이완인, 중국인, 말레이인, 화교, 타이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미얀마인, 베트남인, 인도인, 유라시아 혼혈인, 태평양 제도 여성이 모두 망라됐다.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1942년 솔로몬해 산호해전과 미드웨이해전 패배, 과다날카날 전투 패배 이후 기업정비령이 선포되면서 전 산업을 군수재 생산 위주로 강제 재편했다. 1942~1943년 겨울 경제 주요 목표가 수정됐고, 1943년 봄과 여름 ‘신계획’이 실시됐다. 민수품 공업이 항공기, 조선 등으로 광범위하게 군수재 생산으로 전환됐고 자재와 노동력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다.

총력전이라고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은 ‘물량전’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일본이 수행했던 현대전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약탈 경제’의 형태로 유지됐다. 그 결과가 좋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NIE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일본인들이 말하는 ‘대동아공영’은 무엇을 의미할까.

2. 일본이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이유는?

3. 일본이 전쟁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벌인 일들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