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이 긴 저장기술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과 영상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쓰는 저장장치 대부분은 수십 년을 버티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수명이 긴 저장 기술을 연구해왔는데,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이 해답 중 하나를 제시했다. 이들이 선택한 재료는 특별한 게 아니다. 놀랍게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리다.
그렇다면 디지털 저장장치는 왜 이렇게 수명이 짧을까? 흔히 쓰는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는 금속판에 자성으로 데이터를 기록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성이 약해진다. USB 메모리나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에 사용되는 플래시메모리도 전하가 서서히 빠져나가 10~30년이면 데이터가 손상될 수 있다. 심지어 장기 보존용으로 쓰이는 자기 테이프도 수십 년이 한계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이 주목한 재료는 유리다. 연구팀은 ‘프로젝트 실리카’라는 이름으로 2017년부터 유리 저장 기술을 연구해왔다. 기존에는 석영유리에서만 구현이 가능했는데, 석영유리는 제조가 까다롭고 구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 연구팀은 구하기 쉽고 저렴한 붕규산 유리로 이 기술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붕규산 유리는 주방의 내열유리 냄비나 오븐용 유리 용기에 쓰이는 흔한 소재지만, 의외로 저장장치로서 큰 강점이 있다.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물이나 열, 먼지에도 강하다. 물리적으로 구조를 변형시켜 정보를 새기면 외부 환경이 변해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다.
연구팀이 개발한 방법의 핵심은 ‘복셀’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픽셀(2D)이라면 복셀은 3차원 공간의 최소 단위다. CD나 DVD처럼 표면에 데이터를 기록하는 기존 광학 저장매체와 달리, 이 기술은 유리 내부 깊숙이 복셀을 새긴다. 연구팀은 1000조 분의 1초(펨토초) 단위로 강력한 레이저를 유리 내부에 쏘아 나노미터 크기의 미세한 변형을 만들어낸다. 이 변형은 크기와 방향이 제각각인데, 마치 나노 크기의 빙산을 유리 속에 거꾸로 박아 넣은 것과 비슷하다.
레이저를 맞은 유리 내부는 빛이 굴절되는 방식이 달라지고 이 굴절률 차이를 0과 1로 해석해 디지털 정보를 저장한다. 연구팀은 복셀을 300층 이상 쌓아 가로·세로 12㎝, 두께 2㎜짜리 유리 조각 하나에 4.85테라바이트(TB)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책 200만 권 또는 초고화질 4K 영화 5000편에 달하는 분량이다.
저장장치는 데이터를 오래 보존하는 일만큼 나중에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저장된 데이터는 광학현미경과 카메라로 유리를 투과하는 빛을 촬영해 읽어낸다. 레이저로 새긴 복셀마다 빛의 굴절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이미지로 포착해 0과 1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이 과정에 카메라 3~4대가 필요했지만, 이제 카메라 한 대만으로도 같은 작업이 가능해졌다.
데이터를 쓰고 읽는 과정이 일반 하드드라이브보다 복잡하지만, 유리 저장장치의 가장 큰 장점은 긴 수명이다. 연구팀은 실험을 거쳐 290℃ 고온에서도 데이터가 1만 년 이상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상온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 보존될 것으로 예상된다. 별도의 냉각 시설이나 유지 보수도 거의 필요하지 않다.
다만 유리 저장장치에도 한계는 있다. 한번 데이터를 새기면 다시 덮어 쓸 수 없기 때문에 자주 수정하거나 접근하는 데이터를 저장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기술이 과학 데이터나 문화유산 기록, 국가 기록물처럼 수십 년에서 수백 년간 보관해야 하는 장기 아카이브에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연구팀은 “문화유산 등 사라져서는 안 될 정보를 영구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언젠가 단 한 장의 유리가 인류의 문화와 지식의 횃불을 수천 년 동안 이어가게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연구팀은 이 기술의 가능성을 여러 방식으로 시험해보고 있다. 영화 <슈퍼맨>을 통째로 유리에 저장하는 실험을 했고, 인류의 다양한 이미지·소리·언어를 담은 ‘골든 레코드 2.0’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1977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선 보이저에 실어 보낸 황금 레코드처럼 수천 년 뒤 후손에게 오늘의 인류를 전하겠다는 목표다. 한 장의 유리가 인류의 기억을 가장 오래, 가장 안전하게 품는 매체가 될 수 있을까. √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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