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선 'FIFA'를 '피파'뿐 아니라 영문 글자대로 읽은 '에프아이에프에이'도 함께 표제어로 올려놓았다. 같은 유형인 '나토'를 따로 '엔에이티오'라고 하지 않듯이 FIFA도 '피파'라고 하면 충분하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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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2026 FIFA(국제축구연맹) 북중미 월드컵 조 추첨 결과 멕시코, 남아공 등과 함께 A조에 속했다. FIFA는 이날 ….” “한국 축구대표팀의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 리그 상대가 결정됐다.” “피파(FIFA·세계축구연맹)는 … 신설된 ‘피파 평화상(FIFA Peace Prize)’을 트럼프에게 수여한다고 밝혔다.” 얼마 전 내년 북중미에서 열리는 월드컵 대회 본선 조 추첨 결과가 발표됐다. 각종 언론이 전한 관련 기사에는 우리말에서 외래 고유 명칭을 옮기는 여러 방식이 드러나 주목을 끌었다.‘에프아이에프에이’ 사전에서 버려야‘FIFA’ ‘국제축구연맹’ ‘피파’는 우리말 안에서 동일한 국제기구를 나타내는,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말이다. FIFA는 영문 약어(애크로님)이고, 국제축구연맹은 우리말 번역어, 피파는 영문 약어를 한글로 읽은 명칭이다. 영문 약어 중 피파나 나토(NATO) 등 단어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을 ‘애크로님(acronym)’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WTO(세계무역기구)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처럼 단어화해 읽을 수 없는 것을 ‘이니셜(initial)’이라고 한다. 이들은 더블유티오, 오이시디 식으로 영문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야 한다.

애크로님은 원래 단어처럼 읽는 것인데,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선 ‘FIFA’를 ‘피파’뿐 아니라 영문 글자대로 읽은 ‘에프아이에프에이’도 함께 표제어로 올려놓았다. 이는 ‘피파’가 단독으로 우리말 단어로 자리 잡기엔 아직 언어 세력이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사전 편찬자의 개별 판단이 작용한 결과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피파’ 같은 애크로님은 익숙한 정도로 볼 때 단어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니셜처럼 글자대로 읽는 표제어를 함께 올리는 것은 우리말에 불필요한 ‘복잡성’을 더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잉여적 올림말은 시급히 버려야 한다. 같은 유형인 ‘나토’를 따로 ‘엔에이티오’라고 하지 않듯이 FIFA도 ‘피파’라고 하면 충분하다.

우리말에선 왜 외래 고유 명칭을 하나로 통일해 쓰지 않고 제각각 또는 병행해서 표기하는 것일까. 이는 각각의 말이 지닌 언어적 정당성과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가 압도적인 언어 세력을 보이면 그것을 대표어로 쓸 수 있다. ‘유엔’을 비롯해 ‘유니세프, 이메일’ 같은 단어가 그렇게 탄생한 말이다. 유엔은 애초에 국제연합과 영문 약자 UN이 뒤섞여 쓰이다가 지금은 한글 ‘유엔’으로 수렴돼가는 중이다. 국제연합은 현실 언어에서 이미 보기 힘들어졌고, UN과 유엔이 경합하다 근래에 ‘유엔’이 좀 더 강한 쓰임새를 보이는 것 같다.‘이메일 vs 전자우편’ 최종 승자는?‘유니세프(UNICEF)’ 역시 요즘 영문 약어나 ‘국제연합아동기금’을 쓰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영문 약어를 단어로 읽은 ‘유니세프’가 단독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메일’도 처음 나왔을 때는 언론에서 주로 ‘e메일’로 적었다. 차마 ‘mail’까지 영자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electronic’의 첫 글자인 e만 따오고 나머지는 한글로 전사했다. 곧이어 정부에서 ‘전자우편’이란 대체어를 제시해 한동안 세력 다툼을 벌였으나 ‘이메일’의 벽을 넘지 못했다. 현재 ‘전자우편’은 세력이 미미해져 쓰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 ‘이메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유엔’을 비롯해 ‘나토, 피파, 유니세프, 이메일, 아세안’ 같은 외래 약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애초에는 영문 약어와 함께 쓰이다 근래 들어 한글명으로 표기가 수렴된 말들이란 점이다. 이는 영문 약어가 우리말 안에서 자리 잡는 방식 가운데 하나의 큰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간 세력 다툼이 ‘이커머스’로 통일돼가는 것도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AI’와 ‘인공지능’의 진행 방향은 좀 다르다. 두 말 사이에 아직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팽팽한 대치가 전개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AI가 애크로님이 아니라 이니셜이라 단어처럼 읽기 어려운 까닭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