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말하고 들어 체득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자면 결국은 ‘교육’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순재 선생이 생전에 보인 우리말에 대한 열정을 방송 등 대중매체에서 놓쳐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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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연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그친 일화가 여럿이다. 대사를 암기할 때 그는 완벽을 목표로 했다. 사전을 펼쳐 들고 ‘정(丁) 씨는 단음으로, 정(鄭) 씨는 장음으로 발음한다’는 그 앞에서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국민 배우’ 이순재 선생이 지난달 27일 91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영원한 현역’으로 연기 열정을 불태웠던 그를 소개하는 일화 가운데 한 신문의 ‘정(丁) 씨와 정(鄭) 씨의 발음 구별’ 대목은 유독 눈에 띈다. ‘정(丁)’ 씨는 단음, ‘정(鄭)’ 씨는 장음모국어 화자 중에서도 이를 구분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말에서 장음과 단음을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어릴 때는 [눈(目)]과 [눈:(눈)], [밤(夜)]과 [밤:(栗)], [말(馬)]과 [말:(言)]이 단음이냐 장음이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는데, 요즘은 그조차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표준발음법에서는 모음의 장단을 구별해 발음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표준발음법 제6항). 이는 수백 년 동안 국어에서 지켜온 규칙으로, 장단에 따라 뜻이 구별되는 단어 쌍이 있기에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중에서도 성(姓)씨의 장단음 구별은 특히 어렵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김(金) 씨는 단음이고, 이(李) 씨는 장음이다. 그다음으로 많은 박(朴) 씨를 비롯해 조(曺) 씨는 짧게, 송(宋) 씨와 조(趙) 씨는 길게 발음해야 한다. 한글로는 같아도 임(林) 씨는 단음이고 임(任) 씨는 장음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서는 장음으로 소리 나는 표제어에 대해 발음 정보를 따로 제시하므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표준발음법에서는 ‘해설’을 통해 오늘날 우리말 장단의 구별이 다소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형태가 같아도 발음의 길고 짧음에 따라 말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경기도 광주와 광주광역시의 ‘광주’를 발음으로 구별할 수 있다. 호남 광주(光州)는 [광주], 즉 단음이다. 이를 장음으로 [광:주]라고 발음하면 경기도 광주(廣州)가 된다. 한자 ‘빛 광(光)’은 빗살처럼 빨라 단음이고, ‘넓을 광(廣)’은 넉넉해서 장음으로 발음한다고 외워두면 알기 쉽다. 광야(廣野), 광장(廣場), 광고(廣告) 등이 모두 장음이다. 이에 비해 광명(光明), 광속(光速), 광택(光澤) 같은 말은 단음으로 짧게 발음한다. [광주-광:주] 구별…발음 교육 강화를우리말 ‘광(光)’과 ‘광(廣)’에 대한 발음법을 이해했으면 이제 응용해보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광화문’일까 ‘광~화문’일까? 광화문은 한자로 ‘光化門’, 즉 짧게 발음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광복절(光復節)’도 단음이다. 이에 비해 1885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설립된 광혜원(廣惠院)은 ‘광~혜원’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광어(廣魚)’도 [광:장]으로 장음이다. 전북 남원시에 있는, <춘향전>의 배경으로 유명한 ‘광한루(廣寒樓)’ 역시 ‘광~한루’로 길게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한루’의 발음을 정확히 적으면 [광ː할루]다. 이 말에는 장음 외에 ‘유음화’라는 또 다른 우리말 발음 규칙이 있다는 것도 알아둘 만하다. 유음화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ㄴ’이 ‘ㄹ’에 동화돼 [ㄹ]로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난로가 [날로], 신라가 [실라], 대관령이 [대괄령], 한라산이 [할라산], 줄넘기가 [줄럼기], 칼날이 [칼랄], 물난리가 [물랄리]로 발음되는 게 그 예다. 표준발음법 제20항 규정으로, 넓게는 자음동화에 포함되고 정확히 말하면 유음화 현상이다. 이것은 우리말에서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규칙성을 보인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광주(光州)’와 ‘광주(廣州)’의 발음 구별은 굳이 한자를 알아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삼 한자를 따로 배운다고 해서 익혀지는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말하고 들어 체득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자면 결국은 ‘교육’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순재 선생이 생전에 보인 우리말에 대한 열정을 방송 등 대중매체에서 놓쳐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