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샛 경제학

리디노미네이션
카페 메뉴판(사진)을 보면 5000원은 5.0원, 10000원은 10.0원으로 표기한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0을 많이 표기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폐단위 표기가 정부 정책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000원이 1원이 된다고?이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고 합니다. 화폐의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0원의 화폐단위를 10원이나 1원 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단위만 바뀌는 것이지 경제적 실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있었습니다.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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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1953년 2월 15일, 한국전쟁으로 인한 생산 위축과 군사비 지출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이때 화폐 액면금액을 100 대 1로 절하하고,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圜)으로 바꿨습니다. 두 번째는 1962년 6월 10일에 시행되었습니다. 인플레이션 억제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경제개발 자금 확보가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구권인 환의 사용을 금지하고,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화폐단위 변경과 액면 절하를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정책이 극비리에 진행되었고, 교환할 수 있는 신권의 금액을 제한해 국민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의도한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원화 체계가 이때 확립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찬반 논쟁, 이득일까 손실일까?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2분기 말 기준 국내 비금융 부문의 금융자산은 약 1경2928조원이라고 합니다. 경(京)은 0이 16개 붙은 숫자입니다. 1960년 이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465배 증가하면서 물가상승에 따라 숫자 단위가 지나치게 커지는 불편함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리디노미네이션 논쟁도 있었습니다.

찬성 측에서 제시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앞서 언급한 계산, 회계 등의 단위를 단순화하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달러화 대비 환율 표기가 네 자릿수인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해외 투자자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도 리디노미네이션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반대 측은 리디노미네이션이 물가상승을 오히려 자극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1000원에서 1원이 되면 900원인 제품은 0.9원이 아닌 1원으로 올려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율은 그 나라의 펀더멘털(기초체력) 문제이기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단위를 줄인다고 원화 가치가 상승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화폐 교체 비용부터 이에 따른 간접비용까지 수십조원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민 혼란과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냐는 것이 반대 측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책을 시행할 때 중요한 점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사전 준비 등으로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에 혼란만 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정영동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