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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를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반도체 수출을 놓고 경쟁하는 대만이 8월 수출 실적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추월했다는 소식입니다. 대만의 8월 수출은 월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인 584억9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우리나라(584억 달러)를 근소하게 앞섰습니다.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세계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에 대만이 잘 대응한 결과입니다.
급증하는 수출 덕에 대만의 경제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작년 4.3%에 이어 올해에도 4.5%를 기록할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 속도죠. 올해 성장률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5배나 됩니다. 그래서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도 대만이 우리를 앞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선진국의 기준점이라는 1인당 GDP 4만 달러도 대만이 내년에 우리보다 먼저 달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1인당 소득에서 대만, 한국, 일본 순으로 역전되는 겁니다.
결국 한국은 대만에 ‘넘사벽’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앞질러가는 대만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AI 반도체 '여의주' 문 아시아의 용
韓 앞서 소득 4만 달러 진입 눈앞에

AI 반도체 수출이 견인
이 가운데 대만이 수출 실적과 경제성장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우리나라를, 분야별로는 일본까지 앞지를 태세입니다. 일본이 ‘소룡’으로 본 나라가 ‘대룡’이 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그동안 대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만 경제의 역사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1950~1960년대 미국의 대규모 원조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농지 개혁 등을 통해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섬유·전자·기계 등 수출산업과 중소기업 육성, 정부와 민간의 유기적 협력으로 연평균 8~9%의 경제성장을 지속했습니다. 본격적인 성장은 2000년대 들어 정보통신기술(ICT)과 반도체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이들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대만 경제의 급성장은 2020년대에 본격화합니다. TSMC, ASE 등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에 인공지능(AI) 칩을 공급하면서 수출이 폭증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대만은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를 담당하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지로 역할하고 있습니다. AI 반도체 관련 산업은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정말 큽니다. 올해 3.1%로 예상되던 대만의 성장률은 AI 반도체와 관련 ICT·전자제품의 수출 증가로 인해 4.5%까지 상향 조정됐어요.
코로나19 위기 극복에 두각
대만 경제도 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엔 대규모 외환보유액과 금융규제 정책을 방패막이 삼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위기를 관리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금융 자유화 일변도로 나아가지 않고 금융 감독을 강화하고 자본을 규제하는 식으로 시스템 리스크를 최소화했죠.
가까이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란 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는 곳곳의 공장이 폐쇄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와해됐죠. 대만은 이런 충격파 속에서도 성공적 방역 정책을 바탕으로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유지해나갔습니다. 대규모 공공투자를 확대하고 사회복지 시스템을 강화하는 동시에, 디지털 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하며 신속하게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갈등도 대만엔 큰 시험이었어요. 과거 대만은 중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높았으나, 산업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첨단산업은 특히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으로 급속히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대만은 정부의 정책 혁신과 유연성이 뛰어난 나라입니다. 최근의 고성장도 이런 전략과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예를 들어, 대만의 반도체 산업 지원책은 우리나라보다 효과적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대만판 칩스법(반도체법)’이 2023년부터 시행 중인데요, 대표적으로 반도체 연구개발 투자액 25%를 세액 공제해주고 있습니다. 또 2017년부터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한해 연장근로를 허용하는 근로법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보다 대기업의 경제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이지만, 정부는 기업을 밀어주고 대·중소기업은 상생하는 관계가 잘 정립돼 있습니다.NIE 포인트1.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어떻게 성장·변화해왔는지 알아보자.
2. 1인당 소득 4만 달러를 기준으로 주요국을 비교해보자.
3. 대만 경제가 반도체에 너무 집중돼 있지 않은지 토론해보자.親기업·실용 앞세운 대만 정부 큰 역할
다원주의 전통 강한 민족성도 한몫했죠

산학협력 연결하는 정부
세계 반도체 업계를 호령하는 TSMC(대만반도체제조회사)도 1987년 ITRI 주도로 설립됐습니다. 당시 대만은 전자산업을 육성하려 했으나, 대규모 설비투자를 할 민간기업과 자본이 부족했습니다.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는 기존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기 버거웠죠. 이때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하며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 모델의 가능성을 본 장중머우(모리스 창) ITRI 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정부를 설득해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으로 TSMC를 세웁니다. TSMC의 성공 사례는 이후에도 정부의 세제 및 인프라 지원, 연구개발 보조, 인력 양성 정책을 이끌어내는 바탕이 됐습니다.
첨단 기술에 전략적으로 집중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것도 성공 요인의 하나입니다. TSMC는 설립 초창기부터 오로지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에만 집중했습니다. 대규모 자본을 선제적으로 투입해 첨단 미세공정 기술을 확보했죠. 그렇다고 무턱대고 투자만 한 것은 아닙니다. TSMC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식으로 반도체 수요를 확실히 확보한 뒤 투자에 나섰습니다.
한국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학연 협력이 많은 데 반해, 대만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식으로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왔습니다. 스마트폰과 전자제품 조립 분야에서 세계 최대 생산 역량을 갖춘 폭스콘, 무선통신칩과 사물인터넷(IoT) 칩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가진 미디어텍 등도 이런 기반 위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죠. ‘클러스터 집적→민·관 협업→스타트업·인재 유치’ 모델은 이제 우리나라가 보고 배워야 할 판입니다.
경영학계는 이런 대만 경제의 특징을 ‘발전 국가(developmental state)’ 또는 ‘선지 국가(visionary state)’ 모델로 설명합니다. 즉 대만 정부는 시장실패를 보완하고 전략적으로 신성장 산업에 투자하며, 민간기업과 긴밀히 협력해 시장 혁신을 촉진하는 ‘선견지명이 있는 국가’라는 겁니다. 대만 정부는 이념보다는 실용적인 접근방식과 정책을 선호하는데요, 이게 성공 비결 중 하나라는 얘기죠.
다양한 민족, 역사가 자산
문화인류적 설명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대만의 민족성은 상당히 유연하고 열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인 인구는 중국 한족 외에 말레이-폴리네시안계 원주민 16개 부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족도 서로 다른 방언을 쓰는 호클로족, 하카족 등으로 나뉩니다. 이런 다양한 언어와 문화, 종교를 가진 국민이 함께 살아온 역사 속에서 다원주의, 실용주의,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 등이 사회 전통으로 정착됐습니다.
심지어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 때까지 50년간 일본 제국주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요, 우리와 달리 반일 감정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일본의 통치 시기에 질병 통제, 위생. 문해율 개선, 산업 근대화 등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권 회복 이후 국민당 정부의 철권통치와 부패 문제가 일본보다 더 부정적인 기억을 남긴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룩된 대만의 다원주의 문화는 경제발전과 혁신에 좋은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대만의 역사와 경험을 공부하고 따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NIE 포인트1. TSMC와 삼성전자의 경쟁력을 비교해보자.
2. 경제가 발전하면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까? 함께 토론해보자.
3. 19세기 이후 대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