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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이정희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래픽=이정희 한국경제신문 기자
연말이 되면 다음 해의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등장과 이를 보여주는 소비 패턴의 변화를 예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죠. 그런데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이른바 ‘아날로그 노스탤지어(향수)’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의 온기와 냄새가 스며 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그리워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은 또 다른 얘기죠. 예를 들어, 온라인몰과 새벽 배송에 밀려난 줄 알았던 오프라인 유통 매장이 이른바 덕후들의 체험 공간으로 꾸며지며 부활하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의 아이파크몰과 잠실 롯데월드몰 등이 그렇게 변신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손글씨에 ‘흥분’하고, 즉석카메라인 폴라로이드·아날로그 시계·빈티지 의류 등 ‘레트로(복고풍)’ 이미지가 강한 제품을 찾는 수요도 크게 늘고 있어요.

변화를 주도하는 층이 Z세대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와 거리가 먼 젊은이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니,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트렌드는 문화인류학적 고찰의 좋은 아이템이 됩니다. 또 수능 비문학 지문과 논술시험 주제로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디지털 세대인 Z세대가 왜 아날로그 향수병을 앓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 있는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손글씨, 마니아 존, 빈티지 제품 큰 인기
가성비 넘어 '경험비' 중시하는 시대죠
서울 용산아이파크몰에 있는 국내 최대 닌텐도 매장. /한경DB
서울 용산아이파크몰에 있는 국내 최대 닌텐도 매장. /한경DB
Z세대의 아날로그 향수는 일종의 ‘간접 체험을 통한 향수’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1997~2012년에 태어난 Z세대는 아날로그 제품을 많이 써봤다고 할 수 없죠. 자아에 눈을 뜨기 시작한 10대 때 이미 스마트폰이 일상화됐고, 세상이 점점 더 온라인으로 연결돼 경험 또한 가상공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옛 대중가요 등을 소셜네트워크에서 찾아서 듣고, 지금의 음악에선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받으며 아날로그 시대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계에선 이를 두고 간접 체험에 의한 향수라는 의미에서 영어로 ‘Vicarious Nostalgia’라고 부릅니다.

촉각과 청각에 심취

대표적 ‘아날로그 향수’의 예로 손글씨 열풍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잠자리에서도 숏츠(짧은 동영상)를 놓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멀리 밀쳐놓고 손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교보그룹이 열고 있는 손글씨대회는 2016년 시작될 당시 참가자가 3479명이었는데, 올해는 7만5000명이 넘었습니다. ‘네이버 손글씨 공모전’ ‘톡톡 손글씨 공모전’ 등이 개최돼 예쁜 손글씨도 작품으로 인정하는 트렌드가 생겼어요. 예쁜 한글 서체가 새로 개발된다고 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필체를 보여주는 것이 손글씨의 최대 매력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도 손글씨 문화가 유행 중입니다.

디지털 메시지는 뭔가 차갑고, 한번 쓰고 나면 휘발되어 사라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손글씨 노트·엽서, 손 편지 등은 사람의 정성과 개성을 담을 수 있어 디지털 시대에 거꾸로 각광받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주목할 키워드가 바로 ‘촉각’입니다. 손글씨는 펜을 직접 잡고 종이에 꾹꾹 눌러쓰면서 특유의 촉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컴퓨터 키보드나 마우스, 터치스크린에선 경험할 수 없는 요소죠.

비슷한 사례로 전자책(e북)이나 디지털 문서(pdf 등)가 아니라 손에 책을 쥐고 읽는 ‘진짜 독서’가 요즘 큰 인기입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죠. 책 읽어주는 유튜버(북튜버), 책과 관련한 사진과 영상을 모은 북스타그램, 그리고 이런 인기 트렌드를 가리키는 텍스트힙(text hip, 책을 읽는 행위가 멋지다는 뜻)이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올해 열린 서울국제도서전도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입장권 예매 단계에서 온라인 판매가 중단될 정도로 인기를 끌어 약 15만 장의 티켓이 매진을 기록했고, 행사장이 문 열기를 기다리는 오픈 런이 연출됐죠.

레트로 리셋, 아날로그 노스탤지어…

아날로그 시대가 지금과 다른 특징은 직접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소통하고,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경험’ 또는 ‘체험’입니다.

쇼핑의 경우, 온라인이 편리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에선 상품을 둘러보고 만져보는 재미가 있죠. 서울 용산아이파크몰에 테마별로 마련된 유명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피규어, 굿즈 매장에 ‘덕후’들이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잠실의 롯데월드몰은 한국적 감성과 취향을 경험할 수 있는 K-패션 브랜드로 가득해 외국인들에게 인기입니다. 여의도의 더현대 서울은 백화점을 문화와 휴식의 공간, 나아가 공원 느낌이 나게 만들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의 디지털 소통에서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이렇게 감성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쇼핑을 할 때 ‘가성비’의 시대가 가고 ‘경험비’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런 트렌드를 ‘레트로 리셋(Retro Reset, 복고풍으로 재정의)’ 또는 ‘디지털 노스탤지어’라 부릅니다. 디지털 시대에 불고 있는 과거(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선 마치 디지털에 향수를 느끼는 것 같은 오해가 생길 수 있죠. 그래서 이 글에선 ‘아날로그 노스탤지어’라고 지칭합니다.NIE 포인트1. 온라인과 디지털 세상에서 어떤 공허함을 느끼는지 친구들과 얘기해보자.

2. 나도 ‘아날로그 노스탤지어’ 취향을 갖고 있을까?

3. 아날로그 노스탤지어는 지속될 수 있는 트렌드일까?"사람 냄새 나는 시공간으로 돌아가고파"
아날로그 체험이 구매와 브랜드 신뢰 좌우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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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레트로 리셋’이 유행인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겁니다. 여기에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점부터 레트로 리셋에 대한 경영학 이론의 설명에 이르기까지 분석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날로그 vs 디지털

아날로그(Analog)와 디지털(Digital)은 데이터와 신호를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뜻합니다. 아날로그는 연속적이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그대로 기록하거나 전달합니다. 반면 디지털은 불연속적인 신호, 즉 0과 1 등 개별적인 값으로 정보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아날로그시계의 초침은 물 흐르듯 움직이지만, 디지털시계는 1초, 1분 등 정해진 간격대로 계단식으로 표시하죠. 따라서 어떤 정보를 정확히 인식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는 디지털이 유리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느낌과 따뜻함, 인간적 감정 등은 아날로그에서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은 다소 삭막한 느낌을 주는 반면, 아날로그 공간은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향수 마케팅도 ‘진정성’ 중요

경영학 이론은 아날로그 노스탤지어나 레트로 리셋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올해 세계소비자학회 학회지(ACR Journal)에 실린 ‘과거 중심의 광고와 Z세대의 소비(How Past-Centric Ads Affect Gen Z Consumption)’라는 제목의 논문은 Z세대의 ‘간접 체험을 통한 향수(Vicarious Nostalgia)’를 분석했습니다.

논문 저자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과거의 스타일이나 레트로 문화를 TV, 소셜네트워크 등의 미디어로 접하며 일종의 ‘집단적 향수’를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과거 중심의 광고나 콘텐츠를 제작하면 Z세대는 그 브랜드에 친근감을 느끼고 신뢰를 갖게 되며, 구매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감성적인 자극이 태도와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공동의 기억과 향수를 자극하면 브랜드와 소비자 간 정서적 관계가 깊어진다는 브랜드 관계 이론(Brand Relationship Theory)을 제시합니다.

물론 브랜드를 알리는 스토리에서 진정성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게 조금이라도 인위적인 느낌을 주면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은 디지털 과부하, 익명성, 빠른 변화로 이미 심신이 지친 상태인데요, 아날로그적 감성과 오프라인 경험, 레트로한 디자인을 접하면 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다고 경영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만큼 ‘향수 마케팅’의 위력이 크다는 얘기죠.

‘머무는 경험’ 찾는 Z세대

실제로 Z세대는 쇼핑할 때 물건을 사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부가적으로 유통점에 ‘머무는 경험’을 즐긴다고 합니다. 현실의 감각과 아날로그적 향수를 더 느끼고 싶어서 상품 검색은 온라인에서 하되, 구매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의 오프라인 유통업은 가격경쟁이 아닌 체류 경쟁, 물건이 아닌 콘텐츠로 승부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유명 스포츠·아웃도어용품 브랜드인 글로브트로터(Globe-Trotter)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브랜드의 매장에는 비바람이나 폭풍, 극한 추위 등 악천후를 체험할 수 있는 ‘나쁜 날씨 피팅 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수·방풍 재킷을 사기 전에 일단 입어보고 이 피팅 룸에서 그 기능을 테스트해보라는 겁니다. 경험해보고, 기능에 만족한다면 바로 결제하지 않을까요?

넷플릭스는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미국의 인기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2016년 넷플릭스용으로 다시 제작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선 ‘루크스 다이너(Luke’s Diner)’란 식당이 중요한 공간입니다. 드라마 팬들은 이 식당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넷플릭스는 시리즈 홍보를 위해 미국 전역의 200여 카페를 루크스 다이너로 탈바꿈시키고, 팬들이 현장에서 드라마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형적인 향수 마케팅 사례입니다.NIE 포인트1. AI로 발전하면 AI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2. 쇼핑 공간에서 ‘머무는 체험’을 해봤다면 친구들과 공유해보자.

3. ‘향수 마케팅’의 사례를 찾아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