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혈액형
세상에 단 한 사람만 가진 희귀한 혈액형이 발견됐다. 주인공은 카리브해 과들루프라는 섬 출신의 68세 여성이다. 지난 6월, 프랑스 혈액청(EFS)은 이 여성의 혈액에서 새로운 혈액형 시스템 ‘PIGZ’와 혈액형 ‘과다 음성(GWADA negative)’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ABO식 혈액형은 1901년 오스트리아의 의사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발견했다. 그는 환자들의 혈액을 섞어보다가 서로 뭉치는 응집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고, 그 원인이 특정 항원과 항체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란트슈타이너는 이를 바탕으로 A·B·AB·O형의 네 가지 혈액형을 분류했고, 이 공로로 193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후 란트슈타이너는 또 한번 중요한 혈액형을 발견했다. 바로 Rh 혈액형이다. 적혈구 표면에 ‘D 항원’이 있으면 Rh 양성(Rh+), 없으면 Rh 음성(Rh-)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혈액형을 구분하는 이유는 수혈 시 일어나는 면역반응을 막기 위해서다. 혈액형이 맞지 않는 사람의 혈액을 수혈받으면 면역계가 해당 혈액을 외부 침입자로 인식해 적혈구를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혈액이 뭉치고 혈관이 막히거나 장기가 손상되어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혈액형 판별은 안전한 수혈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런데 사실 ABO와 Rh 혈액형 외에도 인간에게는 수많은 혈액형이 있다. 국제수혈학회(ISBT)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한 혈액형은 48가지에 달한다. Kell, Duffy, Kidd, Deigo 등 낯선 이름의 혈액형이 있으며, 각각 특정 유전자와 단백질 변이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혈액형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 항원이 외부 병원체와 맞서 싸우는 방패로, 면역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감염병과 싸워온 결과로 다양한 혈액형이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흔한 Duffy 음성 혈액형은 말라리아원충의 감염을 막아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과다 음성’은 48번째 혈액형으로 기록됐다. 2011년, 당시 54세이던 이 여성은 프랑스 파리에서 수술 전 혈액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일치하는 혈액형을 찾을 수 없었고, 혈액에서 정체불명의 항체만 발견됐다. 당시 기술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미스터리로 남았는데, 2019년 희귀 혈액형 전문가인 슬림 아주지 프랑스 혈액청 연구원 연구팀 덕분에 돌파구가 열렸다.
연구팀은 2년간 2만 2000여 개의 유전자를 분석한 끝에, ‘PIGZ’라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냈다. PIGZ 유전자는 세포막에 특정 당을 붙이는 효소를 만드는데, 돌연변이 때문에 효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적혈구 표면의 분자구조가 바뀌고 새로운 혈액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연구팀은 유전자 편집 기술로 이 과정을 재현했고, 새 항원에 여성의 고향 이름을 따 ‘과다(GWADA)’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여성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과다 항원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는 수혈이다. 이 여성은 긴급 수혈이 필요할 경우 다른 누구의 혈액도 받을 수 없고, 오직 자신의 혈액만 수혈받을 수 있다. 이런 희귀 혈액형은 의료 현장에서 큰 고민거리다. 사고나 수술로 대량 출혈이 발생했을 때 맞는 혈액을 구하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환자는 자신의 혈액을 미리 보관해두거나, 국제 희귀 혈액은행을 통해 비슷한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찾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인 경우에는 사실상 방법이 없다.
그래서 최근 과학자들은 모든 혈액형에 수혈할 수 있는 범용 혈액을 개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줄기세포에서 적혈구를 인공적으로 배양하거나, 효소를 이용해 적혈구 표면의 항원을 제거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희귀 혈액형 환자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혈액 부족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어 수혈 시스템에 혁신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번 ‘과다 음성’ 혈액형의 발견이 혈액 분야의 연구를 더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