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내가 보는 빨간색과 네가 보는 빨간색, 과연 똑같을까?” 오랫동안 철학자와 과학자를 괴롭혀온 난제다. 이 질문에 최근 뇌과학이 해답을 내놓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같은 빨간색을 본다. 사람 눈의 물리적 구조는 제각각이지만, 뇌가 신호를 처리하는 방식은 생물학적으로 표준화돼 있기 때문이다.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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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사과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특정 브랜드를 상징하는 노란 로고를 보면 당장이라도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처럼 색깔은 단순히 세상을 보는 것을 넘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까지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과연 내가 보는 빨간색과 다른 사람이 보는 빨간색은 똑같을까? 최신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다. 개인의 주관적 느낌과 별개로, 인간의 뇌는 보편적 패턴으로 색상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의 눈은 카메라에 비유된다. 하지만 우리 눈은 공장에서 찍어낸 균일한 센서와 다르다. 인간의 망막 구조는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다. 색을 감지하는 원뿔세포는 시야 정중앙인 황반에 빽빽하게 밀집해 있고, 주변부로 갈수록 그 숫자는 급격히 줄어든다. 정면의 물체는 선명하지만, 곁눈질로 본 물체의 색은 흐릿한 이유도 그래서다.

세포의 분포도 지문처럼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마치 초코칩 쿠키 위에 박힌 초콜릿 위치가 쿠키마다 다른 것과 같다. 누군가는 빨간색 감지 세포가 시야 위쪽에, 누군가는 아래쪽에 더 많이 분포한다. 이처럼 똑같은 빨간 점을 보더라도, ‘하드웨어’인 망막 구조가 다르기에 눈이 뇌로 보내는 초기 신호(입력값)는 물리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입력값이 상이한데도, 어떻게 하나의 대상을 모두 같은 색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독일 튀빙겐대와 막스플랑크 생물사이버네틱스 연구소팀은 그 해답을 뇌의 시각피질에서 찾았다. 연구팀은 인간의 뇌에 모두가 공유하는 색채 지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제 학술지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사람마다 눈의 구조는 제각각이어도, 뇌가 색을 처리하는 방식은 유사했다. 사람마다 눈이라는 하드웨어는 달라도, 색을 처리하는 뇌의 소프트웨어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과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피험자들에게 빨강, 파랑, 초록 등 다양한 색을 보여준 뒤, 뇌의 시각피질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정밀하게 촬영했다. 이후 한 그룹의 뇌 활동 패턴을 학습한 AI에, 전혀 다른 사람의 뇌 스캔 데이터를 입력했다. 놀랍게도 AI는 뇌 활동만 보고 타인이 무슨 색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맞혔다. 개인차를 뛰어넘는 공통된 처리 규칙이 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핵심은 ‘공간적 편향’이다. 시각피질은 망막의 어느 위치에서 신호가 왔느냐에 따라 특정 색상을 더 잘 처리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 위치별 색채 선호는 개인차가 거의 없이 모든 참가자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결국 입력 조건이 달라도, 우리 뇌에는 색을 표준화해 해석하는 생물학적 규칙이 각인돼 있는 셈이다.

올해 초 진행된 마카크 원숭이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됐다. 원숭이의 뇌 역시 인간처럼 시야 위치에 따라 작동 방식이 달랐다. 하늘이 위치한 시야 상단을 볼 때는 자연광의 미세한 색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면 땅이 있는 하단을 볼 때는 색상보다 명암과 형태 파악에 집중했다. 이는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생존 환경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도록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과 영장류라는 범주 안에서만 유효하다. 다른 동물들은 아예 눈이라는 하드웨어 규격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뿔세포가 3개인 삼색각이다. 반면 개나 고양이는 세포가 2개뿐인 이색각이다. 이들에게 빨강은 칙칙한 황갈색이나 회색일 뿐이다. 새나 곤충은 사색각 눈을 가져 인간은 못 보는 자외선까지 감지한다. 받아들이는 기관이 다르면, 경험하는 세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연구는 뇌 속에 있는 공통된 시각 처리 지도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응용 가치가 크다. 향후 색맹이나 시각장애 교정 장치 개발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시각 인지 방식을 모방해야 하는 자율주행차의 AI 센서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도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될 전망이다.√ 기억해주세요
조혜인
과학칼럼리스트
조혜인 과학칼럼리스트
망막의 시세포 분포는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간은 하나의 대상을 모두 같은 색으로 인식한다. 시각피질이 망막의 어느 위치에서 신호가 왔느냐에 따라 특정 색상을 더 잘 처리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 위치별 색채 선호는 개인차가 거의 없다. 사람마다 눈이라는 하드웨어는 달라도, 색을 처리하는 뇌의 소프트웨어는 동일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