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 14세기 유럽 강타
영국·스웨덴·독일 등 인구 절반 사라져
피렌체 등 주요 도시 인구 '반토막'
사회·경제 구조 송두리째 '흔들'
사람 귀해지고 땅 남아돌며 토지가치 급락
"몫 제대로 달라" 농민 임금 4배 급증
힘세진 약자·지배층 대립에 혁명 잇따라
“최근 중국, 북인도를 비롯한 동방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연령과 인종에 상관없이 페스트(흑사병)가 퍼지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피를 토하고 일부는 토혈한 지 얼마 후에, 나머지는 2~3일 뒤면 죽는다. 전염병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차츰 번져나가 마침내 흑해와 시리아, 터키와 이집트, 홍해와 북방의 러시아, 그리스, 아르메니아까지 모두 퍼졌다….”영국·스웨덴·독일 등 인구 절반 사라져
피렌체 등 주요 도시 인구 '반토막'
사회·경제 구조 송두리째 '흔들'
사람 귀해지고 땅 남아돌며 토지가치 급락
"몫 제대로 달라" 농민 임금 4배 급증
힘세진 약자·지배층 대립에 혁명 잇따라
1346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인 마테오 빌라니는 머나먼 동방에서부터 번지는 흑사병 소식을 상세히 기록했다. 하지만 그도 미처 몰랐었다. 빌라니가 살고 있던 유럽도 조만간 이 미지의 전염병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당대의 유럽인도 이 끔찍한 전염병이 머나먼 동방의 중국에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랍의 의사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기록자도, 러시아 평원의 희생자들도 정확히 질병의 발원지라는 키타이(중국)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사실과 전설·전언이 섞인 형태로 전한 것이긴 하지만, 이 끔찍한 질병의 근원지로 모두 중국을 지목했다. 중국 우한에서 처음 등장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오늘날의 코로나19와 너무나 유사하게….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처럼 중·근세 시대 유럽을 뒤흔든 치명적 전염병은 처음에는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다뤄지다가 순식간에 자신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됐다.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던 대전염병은 사회·경제구조에 심원한 변화와 흔적을 남겼다.

지역에 따라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 곳도 있었다. 영국에서 1340년대 페스트가 처음 닥쳤을 때는 인구의 20%가, 1360∼1375년 창궐기엔 인구의 40%가 줄었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의 인구수를 18세기 초에 가서야 간신히 회복했다. 특히 시골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의 타격이 컸다. 1338년 11만 명에 달하던 피렌체 인구는 1351년 4만5000~5만 명으로 줄었다. 모데나 거주자 수도 1306년 2만2000명에서 1482년 8000~9000명으로 감소했다. 스웨덴과 덴마크를 비롯해 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은 인구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더군다나 전염병의 저주는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반복됐다.
하지만 이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수중에 넣을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희소해지면서 대폭적 임금 상승이 뒤따랐다.
흑사병이 발발하기 전에는 ‘찍소리’ 못 했을 사회 하층과 농민들도 어느덧 영주와 지주, 귀족들에게 자신의 몫을 제대로 달라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사람은 귀해지고, 땅이 흔해지면서 토지 가치가 하락해 귀족층은 힘이 약해진 반면 임금 상승 영향으로 중산층과 사회 하층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4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를 후대 역사가는 잉글랜드 농민들의 ‘황금시대’로 부르게 된다. 실제 당시 농민들의 실질소득 수준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컥스함에서 쟁기질하는 사람은 흑사병 이전에는 1년에 2실링을 받다가, 1349년에서 1350년까지는 7실링을 받았고, 1350∼1351년에는 1년에 10실링 6펜스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윈체스터 장원에선 임금이 25∼33% 올랐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영지에선 임금이 75%나 뛴 것으로 분석된다. 잉글랜드의 임금지수는 1340~1359년 94에서 1360~1379년 105로 뛰었고, 1380~1399년에는 122로 올랐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기능사 임금은 1320~1340년 투르 주조 화폐로 2수였지만 1340~1405년엔 4수로, 1405~1520년엔 5수로 폭등했다. 같은 시기 뷔르츠부르크 인부 임금은 세 배나 올랐다. 마테오 빌라니는 “인구가 줄면서 일 인당 확보한 토지가 늘고 재산이 늘게 됐다”며 “이에 따라 사람들은 마치 예전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옛일을 잊었고, 사회 하층민들은 예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당시 세태를 두고 한탄했다.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도 활발해졌다. 폴란드에서 잉글랜드까지,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영국의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는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했을 정도다.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장기적 경제 현상도 목도됐다.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의 경우 1350~1420년 일인당 총생산 증가율이 40%에 달했다. 70년이라는 기간의 평균을 내보면 연간 0.8%의 성장률이다. 이런 ‘높은’ 성장률은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일인당 보유 가능한 토지와 자본의 규모가 증가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대참사를 겪은 뒤 유럽인들이 성서 속 심판론에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가파르게 경제성장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중세 후기 대형 성당과 각종 교회 건물이 들어서는 것도 가능해졌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페스트, 산 자에겐 축복"…전염병이 바꾼 사회](https://img.hankyung.com/photo/202509/01.41090984.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