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첩(大捷)’은 ‘대승(大勝)’을 뜻한다. 순우리말로 풀면 ‘크게 이김’이다. 이미 싸움이 끝난 뒤에 쓰는 말이다. 말을 정확히 쓰지 않고 대충 왜곡해 사용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思考) 체계도 함께 비틀어진다.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 포스터.   tvN 제공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 포스터. tvN 제공
케이블방송 tvN이 8월 말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폭군의 셰프’가 화제다. 프랑스 요리대회 우승자인 여주인공이 최고의 순간 과거로 떨어져 최악의 폭군이자 절대 미각 소유자인 왕을 만나 벌이는 로맨틱 코미디란 설정이 시청자의 관심을 한껏 끈 듯하다. 게다가 본 방영 전 드라마 매력을 미리 엿볼 수 있는 ‘폭군의 셰프 입궁식’에서 수라간 요리대첩이 방영돼 기대감을 더 높였다. ‘대첩=대승’…싸움 뒤에 쓰는 말“한식대첩 … 맛집을 가린다.” “한·일 라면대첩이 열린다.” 이런 표현을 요즘 흔히 본다. 이번 방송에서도 여지없이 ‘수라간 요리 대첩’이 나왔다. 이런 표현은 우리말을 왜곡한다. ‘요리대전’이라고 하면 충분하다. 좀 강한 표현을 쓰고 싶으면 ‘한판승부’니 ‘맞짱 뜬다’고 해도 그만이다. 우리말에서 ‘대첩’이 들어간 역사적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게 꽤 있다. 행주대첩이나 귀주대첩, 명량대첩 등이 그것이다. 이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대첩(大捷)’은 ‘대승(大勝)’을 뜻한다. 순우리말로 풀면 ‘크게 이김’이다. 이미 싸움이 끝난 뒤에 쓰는 말이다.

‘첩(捷)’은 ‘빠를 첩, 이길 첩’으로 쓰이는 글자다. 우리말 ‘첩경’(捷徑, 지름길), ‘민첩하다’(敏捷, 재빠르고 날래다) 등에 이 ‘첩’ 자가 들어 있다. ‘이길 첩’으로 쓰인 말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대첩’ 정도다. ‘첩’과 ‘승(勝)’은 같은 글자다. 하지만 현대 국어에서는 ‘승’에 밀려 ‘첩’이 들어간 말은 ‘~대첩’ 이외에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그저 국어사전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령 ‘전첩국(戰捷國)’이라 하면 전쟁에서 이긴 나라를 뜻하는데, ‘전승국/승전국’과 같은 말이다. ‘첩보(捷報)’란 싸움이나 경기에 이겼다는 소식, 즉 ‘승보(勝報)’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대첩’의 뜻을 정확히 모른 채 이 말을 마치 ‘대전(大戰, 큰 싸움)’이나 ‘대전(對戰, 맞서 싸움)’ ‘대결(對決)’ 정도로 잘못 알고 쓰는 듯하다. ‘대첩’은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쓰는 말이 아니다. ‘(싸움에서) 크게 이김’을 뜻하는 말이다. 말을 정확히 쓰지 않고 대충 왜곡해 사용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思考) 체계도 함께 비틀어진다. 입도선매는 ‘미리 팖’? ‘미리 삼’?인공지능(AI)은 이제 차세대 성장동력의 맨 앞에 자리 잡았다.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AI 인재 확보에 앞다퉈 나선다. “AI 인재 입도선매 나선 엔비디아 … 대만에 글로벌 R&D본부 설립.” 지난 5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 발언을 언론이 비중 있게 전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AI 인재를 ‘입도선매’, 즉 미리 확보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입도선매(立稻先賣)’라는 게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말을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으로 설명한다. 이 풀이는 입도선매하는 주체가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한자 ‘매(賣)’ 자가 ‘판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전 풀이(‘미리 팖’)와 요즘 쓰는 입도선매의 의미(‘미리 삼’)는 전혀 다르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입도선매’는 지난 시절의 용어로, 궁핍한 농촌 생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서 있는 벼를 먼저 파는 것’이다. 예전에 돈에 쪼들린 소작농들이 벼가 여물기도 전에 헐값에 미리 판 데서 생겼다. 조선 말 양반 지주들, 특히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비호를 받은 일부 악덕 상인과 지주이 농민을 수탈하던 수단으로 삼은, 아픈 역사가 담긴 말이다. 과거 신문에서는 1950년대에 ‘입도선매’가 많이 등장한다. 이때까지도 ‘미리 팖’의 의미로 썼다. 당시 농촌에서 입도선매가 성행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990년대에 이 말의 빈도가 다시 확 늘어나는데, 이때는 이미 입도선매의 용법이 ‘미리 삼’으로 달라졌다. 1950년대에는 농촌의 피폐한 생활상을 나타냈지만, 40여 년 뒤에는 그 의미와 용법이 요즘 쓰는, 인재를 미리 확보한다는 좋은 의미의 단어로 바뀌었다. 지금은 누구나 그렇게 알고 쓴다. 그렇다면 사전에도 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입도선매(立稻先賣)와 함께 입도선매(立稻先買), 즉 ‘살 매(買)’ 자를 쓴 말을 올리면 된다. 그래야 사전 정보와 현실 어법 간 괴리를 메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