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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이번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K-조선’의 기여 때문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미국이 중국에 세계 패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해군력 강화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 조선업의 부활이 절실합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필요를 정확히 봤고, ‘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글자를 새긴 모자를 제작해 미국 상무장관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엔 세계 최대 선단을 보유한 조선 최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의 조선 기술을 이전받아야 할 정도로 쇠락했죠. 양국의 산업 위상이 이렇게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물론 사람의 직접적 노동이 중요한 조선업은 사양산업이란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중국 조선업의 맹추격도 위협적이죠. 그러나 한국의 조선업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잠수함 등 특수선, 해양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습니다. 조선업뿐만이 아닙니다. 반도체, 원자력발전, 바이오 등 분야에서도 K-제조업의 힘과 위상은 세계 각국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 경제 환경에선 제조업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세계 주요국이 제조업 경쟁력 회복에 올인하고 있는 이유, 우리나라 제조업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등을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경제안보·성장 위해 생산 기반 필수
세계가 제조업 경쟁력 회복에 올인하죠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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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 주요국들은 제조업 생산 기반을 다시 다지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미국이 먼저 치고 나가고 있지만, 유럽 각국과 일본도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제조 기반 확충에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흐름은 코로나19 팬데믹 때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결과입니다

코로나19 사태와 패권 싸움의 결과물

팬데믹 당시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경제적 충격이 더 컸고, 자국 내에 제조업 기반이 있는 나라는 마스크·백신·의료용품 등 필수품의 공급과 경기 회복 측면에서 유리했습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필요 품목을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국가안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확산됐죠. 제조업이라고 해서 효율성이나 수익만 따질 일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회복력이나 안보 등과 연관 지어 봐야 한다는 인식도 생겼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업의 제조업 비중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서비스업의 경쟁력을 높여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기치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제조 기반이 매우 탄탄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면서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제조업 기반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다음으로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경쟁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은 더욱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양국은 단순한 무역·경제를 넘어 첨단기술, 공급망, 국가안보 차원에서 경쟁합니다.

그런데 제조업은 이 패권 다툼의 핵심적 요소입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첨단 반도체와 2차전지, 전기차, 인공지능(AI) 등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첨예하게 맞섭니다. 이런 분야의 제조 기반을 장악하는 것이 국가안보와 경제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죠.

미국은 더 나아가 중국의 ‘기술굴기(기술 분야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막기 위해 첨단 반도체 장비와 기술의 수출을 금지하거나 투자를 제한하는 규제 조치도 시행 중입니다.

재산업화 시동 거는 선진국

문제는 미국 등 선진국의 제조업 기반이 극히 약화했다는 점입니다. 설계와 디자인은 고부가가치 영역이어서 선진국들이 유지하고 단순 제조와 생산은 인건비가 저렴한 신흥국에 하청을 준 결과, 생산 기반이 해외로 빠져나가게 됐습니다. 이를 글로벌 아웃소싱(Global Outsourcing), 글로벌 공급망 체계(Global Supply Chain)라고 볼 수 있지만, 탈산업화 또는 산업화 쇠퇴(Deindustrialization)란 관점에선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 제조업의 고용 비중이 1970년 약 28%였으나, 지금은 10% 이하로 줄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에서도 제조업의 고용 및 산업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해왔습니다.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이 큰 독일에서도 자동화와 디지털화의 여파로 제조업의 고용 비중이 줄고 있습니다. 제조업의 기술 발전과 로봇·정보통신기술 등의 발달로 인해 같은 인력으로 더욱 많은 생산량을 얻을 수 있으니 그만큼 고용은 줄어들게 됩니다.

이제 선진 각국은 주요 생산시설을 자기 나라 또는 가까운 지역, 우호적인 국가에 구축하거나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은 반도체, 배터리, 첨단소재 등 핵심 산업 생산시설을 자국이나 인접국으로 이전하고 지원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이고, 공급망(Supply Chain)을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오죠. 굳이 비교해 말한다면 선진국의 재산업화(Reindustrialization) 움직임입니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만 앞세우던 국제분업 체계가 복원력과 안보, 첨단기술, 지속가능성 등을 중시하는 새로운 제조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는 겁니다. 그 속에선 첨단 자동화 투자(스마트공장), 탄소배출 저감, 윤리경영 강화 등이 새로운 트렌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글로벌 아웃소싱, 리쇼어링 등의 개념에 대해 공부해보자.

2.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제조업 및 서비스업 비중에 대해 알아보자.

3. 우리나라 제조 업종별 국내총생산(GDP) 기여도를 확인해보자. 불굴의 창업정신으로 세계 최고 우뚝
"한국과 기술협력 원해"…선진국 '러브콜'
미국 해군성 장관 존 펠란(가운데) 등이 한화가 인수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필리조선소를 둘러보고 있다.  한경DB
미국 해군성 장관 존 펠란(가운데) 등이 한화가 인수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필리조선소를 둘러보고 있다. 한경DB
K-제조업의 기술 수준과 세계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한국과 미국 조선업의 상반된 역사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3년 포항제철(현재의 포스코)이 처음으로 철강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을 중점 육성하며 대형 조선소도 건립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자본도, 기술도, 제조 경험도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사업 환경이었습니다. 믿을 건 불굴의 창업 정신과 도전 의식밖에 없었죠.

한국·미국 제조업의 성쇠

유명한 일화는 1970년대 초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영국 은행 바클레이스로 부터 조선소 건설과 관련한 투자 유치에 성공한 일입니다. 바클레이스는 신뢰할 만한 기관의 추천서를 요구했고, 정 회장은 영국의 조선 컨설팅 회사인 A&P 애플도어 회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500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런 배를 만든 나라가 한국이라며 적극 추천해줄 것을 요청했죠. 당당한 그의 태도와 확신에 찬 어조에 감동한 애플도어 회장은 추천서를 써줬고, 이게 한국의 조선소 건설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꾸준한 설비 증설과 기술 축적으로 1980년대 후반 일본과 유럽의 조선 강국들을 따라잡았습니다. 1999~2000년엔 세계 수주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어요. 현재 양적으로는 중국 조선산업에 밀리고 있지만, 첨단·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하고 친환경·디지털 혁신을 가속화하며 세계 조선업계의 품질과 기술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습니다.

미국 조선업은 정반대 길을 걷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초대형 상선과 군수지원선 등 5000여 척을 건조해 세계 최대 선단을 보유하고 기술과 생산력에서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글로벌 경쟁 심화, 고임금, 보조금 폐지 등으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민간 조선소가 수없이 문을 닫았죠. 결국 2023년 기준 미국의 민간 대형 선박 건조량은 연간 5척 이하, 주요 대형 조선사도 4곳으로 줄었습니다.

미국의 제조업 쇠퇴는 비단 조선업만이 아닙니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쓴 자전적 소설 <힐빌리의 노래>를 보면 미국 제조업의 심장부였다가 이제는 공장들이 문을 닫고 쇠퇴한 러스트 벨트의 암울한 현실이 나타납니다. 철강과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이 번성하던 오하이오주가 그 배경인데요, 지금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근로자들이 생계 자체를 위협받으며 도시가 황폐화했습니다. 산업화가 반대로 진행됐다는 뜻에서 디인더스트리얼라이제이션(Deindustrialization, 산업의 쇠퇴)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한국의 제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여러 사례와 팩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시장을 약 70% 점하고 있으며, 디스플레이 시장의 점유율도 37%를 웃돕니다. 제조업의 부가가치 창출력도 세계 2위 수준입니다. 한국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디지털트윈 등 스마트 제조, 친환경 배터리, 수소 선박, 첨단 의료 바이오 등 분야에서 빠르게 글로벌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제조업 로봇 밀도’도 세계 최고입니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제조업 현장에는 직원 1만 명당 로봇 1012대가 배치돼 있습니다. 이는 한국이 자동차, 반도체 등 첨단 제조 분야에서 생산성과 혁신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증거죠. 이런 성과와 지표를 보면 K-제조업이 이제는 단순 추격자(Follower)가 아닌, 세계 최고 기술력과 혁신성을 갖춘 선도자(First Mover)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요 선진국 기업들도 K-제조업에 기술 공동 개발과 협력을 요청해오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삼성, LG, SK 등은 미국, 독일, 벨기에, 노르웨이 등 유럽·미국 선진국의 유수 기업과 스마트팩토리, 미래 차·배터리, 반도체, 그린수소 등 신성장 첨단산업에서 공동 개발 또는 기술 이전·공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글로벌 산업 경쟁에서 나오는 추격자와 선도자의 개념에 대해 공부해보자.

2. 미국의 관세정책과 미국 내 투자 압박이 과연 러스트 벨트를 살릴 수 있을까?

3. 미국과 한국이 조선업에서 협력 가능한 분야가 무엇인지 뉴스를 정리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