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하다’의 남발은 수많은 토박이말 어휘를 잡아먹어 우리말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해친다. ‘매우, 무척, 아주, 되게, 몹시, 엄청, 무지, 너무, 하도, 사뭇, 퍽, 꽤, 퍽, 제법, 자못, 대단히, 정말, 참, 상당히, 진짜로, 많이…’ 강세 어감을 드러내는 말이 꽤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얼마나 다쳤어?” “굉장히 다쳤어요.” “굉장히가 얼마만큼이지?” “글쎄, 굉장히 다쳤대요.” 아마 죽기 직전의 상처면 한 바늘 꿰맬 정도에서부터 모두 ‘굉장히’인지도 모른다.” 우리말에서 ‘굉장하다’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그 쓰임새를 넓혀간 지는 꽤 오래됐다. 1977년 12월 5일 자에서 한 신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끝마다 ‘굉장히’를 ‘굉장히’ 많이 쓰고 있다며 우리말 세태를 비판했다.토박이 정도부사 써야 우리말 살아‘굉장하다’의 오남용이 우리말에 끼치는 폐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 우리말의 ‘논리적·합리적 표현’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크고 대단한 기세를 나타내는 ‘굉장(宏壯)’을 좋고 슬프고 하는 감성어와 결합함으로써 ‘언어적 자연스러움’을 떨어뜨린다. 심지어 “굉장히 작다” 식으로 의미영역이 반대인 말과 함께 쓰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굉장하다’의 남발이 수많은 토박이말 어휘를 잡아먹어 우리말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해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보통보다 훨씬 더’라는 강세 어감을 드러내는 말이 꽤 많다. ‘매우, 무척, 아주, 되게, 몹시, 엄청, 무지, 너무, 하도, 사뭇, 퍽, 꽤, 제법, 자못, 대단히, 정말, 참, 상당히, 진짜로, 많이….’ 이들은 모두 정도부사로, 영어의 ‘very’에 해당하는 어감을 전달할 수 있다.

정도부사란 수식받는 말의 정도를 한정하는 부사로 강세 어감을 나타낸다. ‘철수는 매우 멋있다’에서 ‘매우’, ‘정상까지 너무 멀다’에서 ‘너무’가 그런 역할을 한다. 글쓰기에서는 이외에도 내용에 따라 ‘기막히다, 놀랍다, 뛰어나다’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해 ‘보통보다 훨씬 더’라는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이들을 섬세하게 구별해 자주 써야 다양한 우리말 용법이 생명력을 갖추고 힘을 받는다. 그것이 우리말을 살리고 언어적 경쟁력도 키우는 지름길이다.‘언어적 자연스러움’ 해쳐선 안 돼요즘 ‘굉장하다’는 개념이 모호한 채 두루뭉술 쓰이는 경우가 많다. ‘넓고 크고 굳세고 씩씩하다’는 뜻을 아무 데나 붙이니 어색한 표현도 늘어난다. “장관이다”란 말이 그중 하나다. ‘장관(壯觀)’은 ‘훌륭하고 장대한 광경’을 뜻한다. ‘굉장하다’라는 표현 속 ‘굳세고 씩씩함’이 살아 있는 말이다. “산 정상에서 본 일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같은 문장이 전형적 쓰임새다.

여기서 의미가 확대돼 지금은 “크게 구경거리가 될 만하거나 매우 꼴 보기 좋다는 뜻으로, 남의 행동이나 어떤 상태를 비웃는 말”로도 쓰인다. 이는 ‘꼴불견’을 비아냥대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런 용법을 국어사전에서도 허용해 풀이로 올렸다. 원래 의미에서 확장해 오히려 반대 의미를 강조하는 용법으로 바뀐 말로도 쓰인다고 본 것이다. 모순적 표현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전에 살펴본 “가관이다” “점입가경이다”와 같은 유형의 용법이다.

하지만 이를 아무 데나 붙이면 글의 흐름이 어색해지니 조심해야 한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한 청문회는 참으로 볼 만했다. 재계 총수들이 청문회장에 줄줄이 불려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어쩌다 저들이 저기 나와서 국회의원의 호통에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는 수모를 당하고 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전 사건을 회상하면서 언급한 대목인데, 이때의 ‘장관’은 어색하다. 그저 ‘꼴불견’이라든가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거나 ‘볼썽사나운 장면’이라거나 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관이다 못해 장관이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니 참 장관이구나.”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이런 용례는 ‘장관’의 의미확대가 이미 자리를 잡아 그 쓰임새에 문제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1957년 완간한 <조선말 큰사전>에서는 ‘장관’을 “보암직하게 굉장한 장면”으로만 풀었다. “올해 진해군항제 벚꽃은 장관이었다.” 이런 데 쓸 때 가장 잘 어울린다. 글쓰기에서 적합한 단어 선택의 기준은 ‘언어적 자연스러움’이 1순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