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지하철·기차·항공기가 멈춰 서고,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는 도로는 삽시간에 거대한 주차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 케이블카에서 위험천만하게 탈출하는 인파는 물론, 안전한 도심에 있는 사람들도 인터넷·금융인프라가 올스톱한 상황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트에는 물과 비상식량을 사재기하려는 사람들이 몰렸죠. 시간이 멈추고 암흑천지가 된 이베리아반도는 ‘인류 문명의 중단’을 느끼게 했다는 얘기도 나왔어요.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선 에너지 생산이 불규칙적인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높아 전력망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인공지능(AI)이 일반화된 시대에 블랙아웃이 발생하면 이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전쟁·지진·홍수에 비견될 대혼란이 일어나고, 막대한 인명 피해도 불가피할 것입니다.
대규모 정전 사태는 왜 벌어지는지, 블랙아웃의 원인으로 재생에너지가 지목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AI 시대에 블랙아웃의 의미와 예방책 등에 대해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스페인 블랙아웃 원인 분분한 가운데
'들쑥날쑥' 재생에너지 문제도 지적돼 블랙아웃은 한마디로 전기가 부족해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전기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중요한 기기부터 차례로 쓰면 되지 않을까요? 나라 전체의 전력 생산이 올스톱되지는 않을 텐데, 왜 한꺼번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할까요? 블랙아웃은 먼저 전력 공급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전기는 교류 전기입니다. 교류 전기는 파도처럼 요동치며 움직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파동을 ‘주파수’라고 하는데요, 우리나라는 220V의 전압을 초당 60번의 파동(60㎐)에 실어 보냅니다. 그리고 전기는 공급과 수요가 일치해 양쪽에서 일정한 압력이 유지돼야 문제없이 쓸 수 있어요. 어떤 원인으로 인해 전기 공급이 모자라게 되면 전력망은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주파수를 떨어뜨립니다. 이게 전기 장비들이 필요로 하는 ‘최저 작동주파수’에 미치지 못하면 장비는 작동을 멈추고 맙니다. 전기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경우에는 반대로 주파수가 크게 높아져 역시 문제가 생기지요.
그래서 전력망을 관리하는 곳에선 전기의 수급을 맞추는 작업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수행합니다. 밤에는 전기 소비가 줄어드니 발전소를 덜 돌리고, 전기를 많이 쓰는 오후 시간에는 전기 생산을 늘리는 식이죠. 이번 스페인 블랙아웃도 전기의 수급이 맞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전력주파수가 갑자기 떨어지는 상황에서 송·변전 시설이 원래 상태대로 있다가는 고장이 납니다. 송·변전 시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능을 차단하면서 정전 사태가 확산된 겁니다. 그것도 문제 발생 수 초 만에 전체 전력망이 붕괴되고 말았죠.
스페인 재생에너지 70% 넘어
전기의 원리를 이처럼 길게 설명한 것은 블랙아웃의 원인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입니다. 정전 사태 발생 초기엔 산악지대가 많은 이베리아반도의 극심한 대기 기온차, 즉 이상기후 현상이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왔습니다. 아래쪽엔 차가운 대기, 위쪽엔 뜨거운 대기가 교차하면서 ‘이상 유도전류’가 생겼고, 이게 송전선로와 공명 현상을 일으켜 송전망을 아래위로 크게 뒤흔든 게 원인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 기상현상이 당시에 나타났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화재나 사이버 공격 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생에너지 생산이 급격히 늘며 순간적으로 전기 공급이 급증한 게 원인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정전 사태 당일 스페인 남서부 태양광발전소에서 2건의 사고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전력 시스템이 불안정해졌다고 스페인 정부는 발표했습니다.
이베리아반도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거센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어서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에 유리합니다. 20년 전 스페인의 화석연료 발전 비중은 80%를 넘었지만, 지금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70%를 웃돌고 있습니다. 유럽의 태양광발전은 2019년까지 독일·이탈리아·영국·프랑스 순으로 많이 했고, 스페인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던 스페인이 2020년부터 태양광발전을 크게 늘려 지금은 이들 5개국 중 독일 다음으로 2위까지 올라왔습니다.
막대한 투자 필요한 재생에너지
재생에너지는 전기 공급이 들쑥날쑥한 간헐성이 특징입니다. 계절·시간·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달라지는 거죠. 발전량이 갑자기 줄거나, 반대로 과잉 생산될 경우 위에서 설명한 대로 전력망의 수급 균형이 깨지고 주파수가 급변동해 블랙아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주 등에서도 태양광 발전량이 급증해 블랙아웃 위험이 커지자, 일부 태양광발전을 강제로 중단(출력 제어)한 사례가 많습니다.
이런 재생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경우,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고 일정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기존 화석연료나 원자력보다 훨씬 더 많은 송전망 설비를 갖추고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인프라도 크게 늘려야 합니다. 원자력발전은 안전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고, 재생에너지는 투자비가 과다하게 들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재생에너지는 친환경적이라는 분명한 장점과 함께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합니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은 각 발전 방식의 장단점을 자국의 상황에 맞춰 따져본 뒤,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에너지 믹스(Energy Mix)에 힘쓰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전기의 공급과 수요를 맞추는 전력망 관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살펴보자.
2. 대규모 정전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찾아보고, 블랙아웃이 얼마나 위험한지 느껴보자.
3. 재생에너지의 장단점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자. AI시대 전기는 혈액, 사고 나면 대재앙
사이버 테러 막고, 수요예측은 정밀하게 ‘블랙아웃’이란 얘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AI)을 떠올릴 겁니다. AI의 대규모 연산을 뒷받침하는 데이터센터는 일명 ‘전기 먹는 하마’이고, AI에 전기는 ‘피’나 ‘산소’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I가 질문에 답하려면 일반 검색보다 10배 이상의 많은 전기가 필요합니다. 1년 전만 해도 AI로 구글 검색을 할 경우 필요한 전력량이 아일랜드의 한 해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2030년에는 AI 데이터센터가 전 세계 전력의 최대 20%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AI 시대엔 블랙아웃의 피해 양상과 크기가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겁니다.

문제는 인류 사회의 AI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생성형 AI를 넘어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범용인공지능(AGI)이 나오면 모든 사회시스템은 더욱더 AI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칩이 충분한 전력을 공급받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세요. AI가 작동을 멈추고, 여기에 연계된 교통신호, 의료 진단, 금융거래, 재난 대응 시스템 등도 모두 정지할 겁니다. 블랙아웃이 단순한 생활상 불편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동시 붕괴를 몰고 오는 대재앙이 될 수 있어요.
조금 더 상상력을 동원해볼까요? 정전 때 AI 시스템이 멈추면, 이를 복구하기 위한 ‘인간 전문가’를 투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 AI는 고도의 자동화와 원격제어로 돌아갑니다. 인간 전문가의 손길이 덜 필요하고, 이는 숙련도 높은 전문직 인력의 양성을 가로막게 됩니다. 사고 발생 시 신속한 AI 시스템 복구가 어려워지는 거죠. AI에 모든 걸 맡겼다가, 위기 때 인간이 아무런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이 블랙아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전력망 테러 가능성
블랙아웃은 테러의 통로로 악용될 수도 있어요. 전력망을 사이버공간에서 공격하는 것이죠. 2016년 우크라이나 블랙아웃이 그런 사례입니다. 당시 러시아 군사정보국(GRU)의 해킹 그룹 샌드웜(Sandworm)은 우크라이나 전력망 제어시스템에 침투해 악성코드를 심고 우크라이나 정전 사태를 유발했습니다. 미국의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미국 내 9개 변전소가 공격당해 18개월 이상의 정전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물리적·사이버 보안 강화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AI 시대엔 AI를 활용한 사이버 테러리즘이 가능하기에 더욱 걱정입니다. AI로 전력망의 취약점을 실시간으로 탐지한 뒤, 대규모 정전을 유발할 수 있죠. 예전엔 국가 주도의 사이버 공격만 가능했다면, 이제는 AI 도구의 힘을 빌려 소규모 테러 조직이나 개인도 전력망을 표적 삼을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오픈소스 AI 모델과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위·변조된 명령을 전력망 시스템에 주입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I 기술로 전기 수요 예측도
AI 시대에 맞는 블랙아웃 예방책이 따로 있을까요? 일단 기본은 전력 인프라의 이중화(backup) 및 분산화입니다. 데이터센터, 발전소, 주요 통신 인프라에 대해 전력 공급선과 설비를 이중화하고, 한 곳의 장애가 전체 시스템 마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분산형 전력망(분산 발전) 도입도 필요합니다. 중앙집중식에서 벗어나 소규모 발전소,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분산형 전력망을 확대해 특정 지역이나 설비의 장애가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힌트는 AI 자체에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AI를 사용해 전력망을 안정화하는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예를 들어, AI가 발전소의 최적 전기 생산량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전력망의 이상 징후를 빠르게 감지해 자동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실제로 지금도 강화 학습, 그래프 신경망 등 첨단 AI 기법을 전력망 운영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AI를 통해 전력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는 게 중요합니다. 즉 날씨·시간·과거 데이터 등을 분석해 전력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수급 균형을 실시간으로 맞춰가야 합니다. 민간 기업들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삼성전자 등은 지역 내 전력 사용량이 급증할 때 스마트홈 플랫폼을 통해 가정 내 가전기기의 전력 소비를 자동으로 줄여주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블랙아웃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인공지능을 ‘전기 먹는 하마’에 비유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2. AI의 막대한 전기 수요에 대비한 전기 공급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3. 범용인공지능(AGI) 수준에 이르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친구들과 얘기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