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한 평등' 지향했던 스파르타
지배층, 근검·절약 미덕…토지는 균등분배
남성은 60세 의무 군복무로 개인 자유 박탈
똑같은 집, 같은 음식, 획일적 평등에 자부심

평등사상, 서구사회에 큰 영향
소크라테스·플라톤부터 루소까지 칭송해
공산주의·나치즘 모두에서 환영 받아

한국에도 뿌리내린 평등주의
돈 많은 것 죄악시하는 문화 팽배
어느 정도 재산권 자유 침해는 당연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위키피디아 제공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위키피디아 제공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하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도시에는 신전이나 웅장한 기념물도 없다. 그저 마을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외관만 비교하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2배는 강성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스파르타를 두고 ‘검소함의 모범’으로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에도 스파르타를 가 보면 과거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이렇다 할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명목상 그리고 실제로 검소한 평등사회를 지향했던 스파르타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첨으로 균등 분배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스파르타 지배층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 같은 규범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함께 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

보통의 스파르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개인의 자유, 사적 재산의 소유 등은 극도로 제한됐다. 교육도 좋게 보면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강제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향한 목적은 문자 그대로 ‘개·돼지’로 여기던 피정복민 노예인 헤일로타이를 무자비하게 복속시키는 데에 있었다. 동시에 다른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을 스파르타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심지어 스파르타 청년은 정식 시민이 되기 위해 헤일로타이를 살해하는 ‘크립테이아(κρυπτεία)’라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고도 알려졌다.

스파르타인들은 농업, 상업,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는 대신 군인의 길만 갈 수 있었던 병영국가에서 살았다. 60세 의무 복무 기간으로 자유로운 개인 생활을 박탈당했던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까지는 ‘아고게(ἀγωγή)’라는 공동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20~30세에는 중앙 기숙사에서 함께 숙박했다. 20세 이후 40년간은 ‘페이디티아(φειδίτια)’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전투하는 이 공동체는 격렬한 운동으로 ‘시장이 반찬’이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악명 높은 ‘멜라스 초모스(μέλας ζωμός)’라는 검은 수프로 끼니를 때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스파르타인은 사생활이란 건 원하지도 않고,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꿀벌처럼 공중의 한 부분이 되어 열광적인 애국심 속에서 자신을 잊은” 존재로 길러졌다.

평생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없었던 대부분의 스파르타인은 획일적 평등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스파르타인들은 정치적 평등과 평등한 삶의 상징으로서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이오이(Ὅμοιοι)’라는 용어를 중시했다.

물론 평등사회의 이념이 생각처럼 현실에 완벽하게 구현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에게 임대하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했고, 식사 공동체에 참가할 만큼의 최소한 수입을 확보하지 못해 ‘동등한 사람’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 채 하층민으로 떨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스파르타식 평등이 소규모 공동체 사회인 스파르타의 울타리를 벗어나 후대로 퍼져 ‘영생’을 얻었다는 점이다. 비록 스파르타 쇠망기 기준이긴 하지만 스파르타가 테베에 참패한 레욱트라 전투가 있던 당시 스파르타의 성인 남자 수는 10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전성기에도 전사 집단을 구성할 성인 남자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당대에는 스파르타 도시국가에 한정되었던 영향력이 후대로 갈수록 증폭됐다.

스파르타의 평등사상은 맞수 아테네의 사상가들을 통해 널리 퍼졌다. 대외적으로 평등사회로 비쳤던 스파르타 사회는 당대의 소크라테스, 플라톤부터 후대의 서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구성원들이 동등한 재산권을 지니며 함께 모여 식사하고, 사치품을 금지하고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스파르타의 전승을 바탕으로 했다. 17세기 영국에선 스파르타가 제한된 왕권의 완벽한 모델로 칭송받았다.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에겐 평등하면서도 공산주의적인 공화국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카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물론 히틀러 치하 나치 독일에서도 스파르타는 국가사회주의의 덕목을 두루 갖춘 ‘그리스의 노르딕 국가’로 칭송받았다.

현대인의 눈에는 기괴하게만 보이는 스파르타 사회는 오히려 ‘전체주의 유토피아’의 시원적 모델 역할을 하며, 20세기엔 공산주의와 나치즘이라는 좌우 전체주의 사상의 양극단 모두로부터 환영받았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와 군국주의 등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평등사상의 영향이 강한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스파르타의 ‘유산’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그런 측면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역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꼽을 수 있다. 각종 부동산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부를 축적해 고가 자산을 보유하는 것은 죄악시되면서 재산권과 자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침해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선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 시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스파르타가 뿌린 평등의 이상까지 닿을 수 있다. 그렇게 과거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