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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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한국사회에 숨 쉬는 '스파르타 평등주의'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하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도시에는 신전이나 웅장한 기념물도 없다. 그저 마을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외관만 비교하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2배는 강성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스파르타를 두고 ‘검소함의 모범’으로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에도 스파르타를 가 보면 과거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이렇다 할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명목상 그리고 실제로 검소한 평등사회를 지향했던 스파르타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첨으로 균등 분배했다고 전해진다.실제로 스파르타 지배층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 같은 규범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함께 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보통의 스파르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개인의 자유, 사적 재산의 소유 등은 극도로 제한됐다. 교육도 좋게 보면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강제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향한 목적은 문자 그대로 ‘개·돼지’로 여기던 피정복민 노예인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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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동맹들에 "지켜줄테니 세금 내라" 겁박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풀꽃만 그런 게 아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 그리스가 그랬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인도의 접경,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한 땅 부자 페르시아에 영토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지중해 무역을 위해 제국의 서쪽 연안 이오니아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다리우스는 전면적인 전쟁 대신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을 하나씩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페르시아의 황금은 언제나처럼 유능했다. 재물이 흘러 들어가자 이오니아 폴리스는 분열했고 곳곳에서 친(親)페르시아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어디에나 삐딱선은 있다. 불필요한 종족주의로 충만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反)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난다.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참교육을 하는 것은 제국의 기본 업무 아니던가. 페르시아의 창칼 아래 600년 역사의 밀레투스는 폐허로 변했고 시민들은 모조리 노예 신세가 된다. 사람이 하나를 얻으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라는 나라를 잘 몰랐다. 장군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게 어디 있는 나라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런데 차지하고 보니 예뻤다. 그리스 본토에도 흥미가 생겼고 게다가 미운 폴리스가 있었다. 밀레투스가 페르시아에 대들 당시 지원군을 보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다. 탐도 나고 괘씸하기도 해서 다리우스는 아테네 정벌을 결심한다. 물론 전쟁 안 하고 협박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면 최고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에 사절단을 보낸다. 항복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