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첫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치료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질병에 걸릴 위험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만 없애고 유전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의학 분야에 엄청난 혁명이 될 것이다. 2012년에 등장한 '크리스퍼(CRISPR)' 유전자가위 기술은 인류에게 이런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그리고 최근, 최초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치료제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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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원하는 위치의 DNA를 잘라내는 기술이다. 원래 이 기술은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는 세균의 면역체계에서 비롯됐다. 세균은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으면 해당 바이러스의 DNA 일부를 자신의 유전체에 끼워 넣어 그 바이러스를 기억한다. 이 위치를 ‘크리스퍼’라고 부른다. 이후 비슷한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이러스 DNA에 결합하는 ‘가이드 RNA’를 만들고, ‘캐스9(Cas9)’이라는 효소가 바이러스 DNA를 자른다. 이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이다. 가이드 RNA를 만들어 편집하고자 하는 DNA의 위치를 찾은 뒤, 캐스9 효소로 자르는 것이다.

이 기술은 의학 분야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변이를 정확히 찾아 없애거나 교정함으로써 유전질환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로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을 개발한 제니퍼 다우드나 미국 UC버클리 교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는 202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현재 많은 제약 회사에서 난치성 유전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 중 낫 모양의 적혈구 빈혈증과 베타-지중해빈혈 치료제인 ‘카스거비(Casgevy)’가 지난해 말 영국과 미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다. 두 질환은 적혈구의 산소 운반을 돕는 헤모글로빈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발생한다. 우선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은 헤모글로빈을 이루는 베타글로빈 유전자의 염기서열 중 단 하나가 잘못되어 발병한다. 이로 인해 원래 글루탐산이어야 할 아미노산이 발린으로 바뀌며 비정상적인 헤모글로빈이 만들어진다. 비정상 헤모글로빈은 다른 헤모글로빈과 뭉쳐, 동그란 모양이어야 할 적혈구가 찌그러진 낫 모양으로 변한다. 낫 모양의 적혈구는 쉽게 파괴되고, 우리 몸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심한 빈혈 증상을 보인다.

베타-지중해빈혈도 헤모글로빈의 유전자 돌연변이로 헤모글로빈 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빈혈이 생기는 질병이다. 주로 지중해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질환은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한 달에 한 번씩 수혈을 받거나 골수이식을 받아야 했다.

카스거비는 이 질환들을 어떻게 치료할까. 우선 환자의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를 채취한다. 조혈모세포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을 생산하는데, 여기서 적혈구의 헤모글로빈 유전자를 찾아 크리스퍼 기술로 염기서열을 교정한 뒤, 다시 환자 몸에 이식하는 방식이다. 이때 교정되는 유전자는 태아 헤모글로빈 생성을 막는 BCL11A 유전자다. 알파와 베타 글로불린으로 구성된 성인의 헤모글로빈과 달리, 태아 헤모글로빈은 알파와 감마 글로불린으로 이뤄져 산소와 더 잘 결합한다. 태아 헤모글로빈은 생후 8주에서 6개월 사이까지 생산되다가, 이후 모두 성인 헤모글로빈으로 바뀐다. BCL11A 유전자를 제거하면 태아 헤모글로빈이 생성돼 산소와 잘 결합하고, 산소 공급을 높여줄 수 있다. 카스거비를 개발한 미국의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와 스위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는 만족할 만한 임상시험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 환자 29명 중 28명이 치료제를 투여받은 후 최소 1년간 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베타-지중해 빈혈 환자 42명 중 39명이 최소 1년간 수혈받을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치료제가 우리의 기대만큼 완벽하진 않다. 치료제를 투여하기 위해 환자는 1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해야 한다. 골수의 줄기세포를 채취하고, 편집된 줄기세포를 다시 주입받기 위해 이전의 골수세포를 죽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비도 엄청난 장벽이다. 220만 달러, 한화로 약 29억 원이나 된다. 또 크리스퍼 기술이 아무리 정확도가 높다 하더라도, 아직 100% 안전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유전자 편집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의도하지 않은 유전자변형이 생길 위험이 있다. 미래에 다수의 유전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포문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기념비적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는 치료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억해주세요
[과학과 놀자] 빈혈 치료에 사용 승인…유전성질환 극복 길 열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원하는 위치의 DNA를 잘라내는 기술이다. 원래 이 기술은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는 세균의 면역체계에서 비롯됐다. 세균은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으면 해당 바이러스의 DNA 일부를 자신의 유전체에 끼워 넣어 그 바이러스를 기억한다. 이 위치를 ‘크리스퍼’라고 부른다. 이후 비슷한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이러스 DNA에 결합하는 ‘가이드 RNA’를 만들고, ‘캐스9(Cas9)’이라는 효소가 바이러스 DNA를 자른다. 이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이다.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