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매운맛의 정체
지난 10월 기네스 세계기록(Guinness World Records)은 고추 품종 중 하나인 '페퍼X'가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에 등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페퍼X를 개발한 사람은 미국 퍼커버트 페퍼 컴퍼니 설립자인 에드 커리다. 그는 페퍼X 이전 매운 고추 챔피언이었던 품종 '캐롤라이나 리퍼'를 만든 인물로, 자신이 세운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기네스 세계기록에 따르면 페퍼X의 스코빌지수는 269만3000SHU다. 이는 캐롤라이나 리퍼 맵기(164만 SHU) 1.6배 수준이다. 미각은 액체 상태의 화학물질이 혀 등의 미각 수용체를 자극했을 때 생긴 ‘맛 정보’가 신경계를 통해 대뇌에 전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맛은 수백 가지이지만, 혀가 느끼는 순수한 맛은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 등 다섯 가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운맛’은 포함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매운맛과 관련된 화학물질이 미각 수용체가 아닌 온도나 통증을 감지하는 수용체 TRPV1에 붙기 때문이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덥거나 얼얼함을 느끼는 게 증거다. 결국 매운맛은 맛이라기보다 혀가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아픔을 느끼는 감각을 일컫는다.매운맛이 온도와 통증이 섞인 감각이라는 사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데이비드 줄리어스 교수가 밝혀냈다. 줄리어스 교수는 TRPV1 수용체가 제거된 생쥐들이 그렇지 않은 쥐보다 뜨거운 물에 둔감하게 반응한다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당시 통증만 감지한다고 알려졌던 TRPV1 수용체가 온도 감지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불어 TRPV1 수용체는 주변 온도가 대략 42℃를 넘었을 때 활성화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줄리어스 교수는 1997년 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고, 이 공로로 202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매운맛에 관해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카나리아 같은 일부 조류는 사람처럼 매운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류의 온도 및 압력 수용체의 구조가 TRPV1 수용체와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그 수용체가 다른 이유를 씨를 퍼뜨리려는 고추의 전략으로 설명한다. 고추의 매운맛이 없으면 인간이나 포유류 같은 ‘적’이 쉽게 고추를 섭취할 테고, 그러면 저작운동으로 인해 씨가 으스러져 버린다. 반면 새는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는 데다 활동 반경이 상대적으로 넓다. 결국 새에게만 달게 느꼈지만 매운맛을 함유하면 새만 고추를 마음껏 먹고 배설물에 포함된 고추씨를 사방으로 퍼뜨리게 된다. 뛰어난 전략이지만, 고추는 사람들이 매운맛을 통증이 아닌 매력적인 맛으로 여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매운 정도는 어떻게 비교할까.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언급한 ‘스코빌지수’가 널리 활용된다. 스코빌지수는 1912년 미국 약사 윌버 스코빌이 고안한 고추과 식물의 매운맛을 나타내는 지표다. 스코빌은 특정 고추 추출물을 매운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설탕물에 희석한 후 고추 추출물과 설탕물 비율을 이용해 매운맛 강도를 수치화했다. 단위는 SHU(Scoville Heat Unit)로, 전혀 맵지 않은 수준인 0을 시작으로 매워질수록 수치가 높아진다.
참고로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순수한 ‘캡사이신’의 스코빌지수는 1600만 SHU다. 식품회사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맵기로 유명한 한국 라면의 경우 신라면이 약 1300SHU, 불닭볶음면이 4400SHU, 불마왕라면이 1만4400SHU 수준이다. 음식 중에는 할라페뇨가 5000SHU, 청양고추가 1만~3만 SHU 정도다. 지구에서 스코빌지수가 가장 높은 물질은 선인장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 ‘레시니페라톡신’이다. 스코빌지수가 무려 160억SHU에 달한다. 몹시 매운 데다 독성이 있어 미량만 먹어도 고통스럽고, 생명에 치명적이다.
이번에 가장 매운 고추로 등극한 페퍼X는 맵기가 청양고추의 100배 수준이라 만지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시중에서 페퍼X를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희석해서 핫소스로만 판매한다. 페퍼X를 만든 에드 커리는 캡사이신 함량이 높은 고추를 만들기 위해 10여 년 동안 자신의 농장에서 매운 고추 몇 가지를 교배해 사육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페퍼X보다 더 매운 고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억해주세요 매운맛은 미각 수용체가 아닌 온도와 통증을 감지하는 수용체 TRPV1에 들러붙는다. 맛이라기보다 열과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다. 일부 조류는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온도와 통증을 담당하는 수용체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매운맛의 세기는 미국 약사 윌버 스코빌이 고안한 ‘스코빌지수(단위 SHU)’로 측정해 비교하는데 수치가 높을수록 맵다. 최근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로 등극한 고추 품종 ‘페퍼X’의 스코빌지수는 269만3000SHU다. 국내외에서 맵기로 소문난 라면인 불닭볶음면은 4400SHU 수준이다.
김우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