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플레이션
먹거리 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논쟁이 일고 있다. 그리드플레이션은 탐욕(greed)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이다. 기업의 과도한 이윤 추구가 물가상승을 초래한다는 뜻의 신조어다. 식품업체가 원자재 가격이 올라갈 때는 즉각 이를 전가하지만, 원자재 가격이 내려갈 때는 훨씬 느린 속도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식품업계 “영업이익률 한 자릿수 불과” 항변천정부지로 치솟던 주요 식품 원료의 가격은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빵, 과자, 라면 등의 주원료인 밀 가격은 이달 들어 부셸당 평균 5.69달러를 기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격이 치솟았던 작년 5월(11.46달러)에 비해 50.3% 하락했다. 같은 기간 팜유(-41.8%) 옥수수(-39.4%) 대두유(-38.3%) 등의 국제 시세도 크게 떨어졌다.원자재 가격이 내려가고 있지만 소비자가 체감하는 먹거리 물가상승 폭은 여전히 높다. 올 1~10월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는 1년 전에 비해 각각 7.6%, 6.4% 상승했다. 이렇게 되자 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그리드플레이션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의심의 단초는 대형 식품업체들의 실적 호조다. 올 상반기 농심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04.5% 늘었다. 빙그레(160.3%), 해태제과(75.5%), 풀무원(33.2%), 동원F&B(29.7%), 오뚜기(21.7%) 등도 영업이익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성명에서 “원재료가 하락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고통을 멀리하고 기업들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식품업계는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한다. 식품업의 수익성 자체가 낮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상반기 주요 식품업체 영업이익률(영업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값)은 농심 6.9%, 오뚜기 7.6%, 빙그레 8.7% 등 한 자릿수에 그쳤다. 통상 이 수치가 10%를 넘는 다른 제조업에 비해 ‘남는 게 많지 않은 장사’라는 항변이다. 업계 관계자는 “밀, 팜유 등이 하락한 것은 맞지만 전분, 설탕 등처럼 비싸진 원재료도 있다”며 “제조 기반의 회사가 한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거뒀는데 ‘탐욕’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과하다”고 했다. “이윤 추구, 인플레이션 본질 아니다” 그리드플레이션에 대한 비판은 인플레이션이 세계적 화두로 떠오른 지난해 미국과 유럽을 시작으로 확산했다. 거대 기업들이 시장 지배력을 악용해 상품 가격을 무분별하게 올렸다는 게 일각에서 제기하는 비판의 요지였다.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는 ‘이윤 추구’는 기업의 존재 목적이기도 한 데다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에서 일한 경제학자 제이슨 퍼먼은 “기업의 탐욕은 인플레이션에 중요한 요인이 아니고, 여기에 초점을 맞추다간 오히려 실제 원인과 해법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우리나라 물가의 큰 폭 상승은 주로 수입 물가 상승에 기인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