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디지털경제와 기술 진보
사회발전은 기술 진보 그 자체가 아닌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선택으로 가능.
어쩌면 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기술이 발전하면 불평등 문제가 사라지고,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으며, 심지어 빈곤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두려워 잠시 멈추기보다 인류가 누릴 풍족한 미래를 생각하며 일단 진행하고, 문제는 나중에 다듬어가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18세기 영국과 21세기 실리콘밸리기술에 대한 낙관론이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장 시스템이 막 도입되기 시작한 18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고용주는 공장 시스템을 환영했다. 숙련 직조공이 하던 업무를 잘개 쪼갠 뒤 핵심 부분을 새로 도입한 기계가 담당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단순 반복 업무는 여성과 아동을 비롯한 저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게 했다. 공리주의자의 창시자로 알려진 제러미 벤담도 이러한 공장 시스템의 도입을 환영했다. 일부 사람이 약간 힘들어지는 대신 다른 일부 사람이 훨씬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사회의 효율성이 개선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사회발전은 기술 진보 그 자체가 아닌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선택으로 가능.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기술은 인간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된다면 효율성과 생산성이 크게 증가된다는 주장 말이다. 이러한 세상이 완성되면 사회는 그 이득을 기술의 혜택이 닿지 않던 곳까지 분배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은 기술의 이득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약간의 의문이라도 발생하려고 하면 이는 피할 수 없는 물결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며 말문을 막아선다. 기술 발전에도 더딘 생산성 증가하지만 역사는 기술에 대한 낙관론이 무색할 만큼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그들의 저서 <권력과 진보>에서 개선된 쟁기와 개량된 수차와 풍차 등이 중세와 근대 초기 농업에서 농민에게 아무런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 영국 산업혁명 초기의 직물 공장은 소수의 사람에게 막대한 부를 창출해주었지만, 노동자의 소득은 100년 가까이 증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를 오늘날의 버전으로 포현하면 컴퓨터 발달로 소수의 사업가와 기업계 거물이 지극히 부유해졌지만, 그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뒤로 밀려났으며 많은 이의 실질소득이 감소했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기술에 대한 우려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대 ‘기술적 실업’을 언급하며 새로운 생산방식이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을 줄여 대규모 실업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했다.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겠지만, 기술이 노동을 절약하는 속도가 노동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속도보다 현격히 빨라질 경우 기술적 실업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케인스보다 훨씬 더 이른 1819년에 비슷한 우려를 표현했다. 기술에 대한 낙관론자이던 그마저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제3판을 개정하면서 인간의 노동을 모두 기계가 할 수 있게 된다면 노동수요가 사라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인류 번영은 기술 선택의 결과하지만 분명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요롭게 살아간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300년 전 사람들보다는 생활수준이 높고,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그저 기술의 발전으로 저절로 따라온 결과는 아니다.
되돌아보면 분명 1950~1960년대에는 기술 낙관론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서구 경제도 좋은 예다. 하지만 오늘날은 분명 아니다. 누구나 디지털 기술에 접근할 수 있지만, 과거와 달리 실질임금은 1980년대 이후 줄곧 내리막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지어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보호가 잘 제도화된 북유럽 국가나 프랑스, 캐나다에서도 같은 현상이 목격된다. 기술의 발전이 저절로 풍요로운 사회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기술과 번영 사이에 다양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선택이 필요하다. 발달된 기술을 근로자 감시에 쓸지, 자동화에 쓸지 새로운 업무 창출을 위한 근로자 역량 강화에 쓸지는 선택의 문제다. 다양한 분야의 이러한 선택이 모여 사회의 발전을 이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