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디지털 경제와 비즈니스 모델
디지털 신생기업이 기존 기업의 핵심 서비스만 빼내는 디커플링 전략에도 수익 모델 변경으로 건재.
사람들은 둘러보기만 할 뿐 사지 않는다. 고객이 북적일수록 매출도 따라 올라간다는 대형 할인점의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012년 세계 최대 전자제품 소매 판매업체인 베스트바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전역에만 1500개 지점을 보유한 베스트바이 매장은 연휴 쇼핑 시즌을 맞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였지만, 그해 분기별 매출은 거의 4% 감소했다.디지털 경제와 쇼루밍고객들은 매장에서 실물을 충분히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주문한다. 직원들은 그런 고객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012년 연휴 쇼핑 시즌이 끝나고 베스트바이가 기록한 분기별 손실은 무려 17억달러였다. 놀란 베스트바이는 고객들이 매장 제품을 온라인으로 검색하지 못하도록 제품명을 가리고 자사의 온라인 쇼핑 앱을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베스트바이만이 아니었다. 뷰티 상품이 모여 있는 세포라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고객들은 세포라 매장을 찾아 샤넬 향수나 입생로랑 립스틱을 사용해보고 그 자리에서 제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2010년 버치박스가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버치박스는 구독 방식의 회원제 화장품 정기 배송 서비스다. 매달 회원비를 받고 뷰티 제품 샘플 세트를 고객에게 보내준다. 고객은 세포라 매장에 방문해 립스틱, 향수 등을 비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점점 많은 사람이 샘플을 통해 자기에게 맞는 제품을 찾아갔고, 그 결과 매장에 어떤 신상품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세포라의 고객은 줄어들었다.디커플링 비즈니스 전략디지털 신생 기업들의 부상은 비단 전자제품과 화장품 분야에서만이 아니었다. 게임, 금융, 자동차 분야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디지털 신생기업이 기존 기업의 핵심 서비스만 빼내는 디커플링 전략에도 수익 모델 변경으로 건재.
과거에는 TV 구입을 위해 매장에 가고, 제품을 고르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 구매하는 과정을 베스트바이 한 곳에서 끝냈다. 하지만 신생 디지털 기업들은 이 연결고리를 끊고, 그중 하나만 담당한다. 아마존은 고객이 베스트바이에서 제품을 선택하고 구매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를 깨뜨렸다. 제품 선택은 베스트바이, 구매는 아마존으로 분리한 것이다.
버치박스도 유사하다. 버치박스는 뷰티 제품의 테스팅과 선택 및 구매를 분리했다. 테스팅은 버치박스에서, 선택과 구매는 다른 소매점에서 하게 된 것이다. 신생 디지털 기업은 기존 기업이 예전부터 제공하던 서비스 단계 중 일부만 도태시키고, 그렇게 분리해낸 일부를 중심으로 전체 비즈니스를 구축했다. 전통적인 경쟁에서는 경쟁자가 성공한 기존 기업의 모든 비즈니스를 대체하려 했지만, 신생 디지털 기업은 달랐다. 고객에게 약간의 가치만 제공하더라도 고객을 빼내 올 수 있기 때문에 기존 기업의 모든 부분을 대체할 필요가 없었다. 매장 임대료, 판매원 인건비, 생산시설 등에 투입되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기존 기업을 완전히 대체할 필요가 없었다. 탈레스 테이셰이라 하버드 경영대학 교수는 신생 디지털 기업의 이런 전략을 ‘디커플링’이라고 정의한다.핵심은 공간의 효율적인 재활용기존 기업은 신생 디지털 기업의 디커플링 전략에 속수무책이었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베스트바이가 대표적이다. 베스트바이는 쇼루밍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아마존 가격에 판매하기도 하고, 매장에서 아마존 검색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고객들의 행동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때 베스트바이는 수익 창출 대상을 고객에서 가전제품 제조사로 변경했다. 베스트바이는 삼성에 매장 내 삼성 전용 제품 공간 설치를 제안하며 수수료를 요구했다. 눈에 잘 띄는 전시 공간을 별도로 내주고 비용을 받겠다는 것이다. 2013년 삼성과의 계약을 시작으로 LG,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과도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 비즈니스 모델이 판매에서 쇼룸으로 바뀐 것이다. 수익률은 급상승했다. 오늘날 베스트바이 수입의 대부분은 입점 수수료가 차지한다.
디커플링 현상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두 가지다. 기존 기업들은 돈 버는 방법을 ‘재학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성가신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방향이어야 한다. 스타트업 하나는 없앨 수 있지만, 또 다른 파괴적 비즈니스의 등장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시사점은 디지털 경제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생 디지털 기업이라고 해서 대단한 기술을 활용한 게 아니다. 디지털 덕분에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수 있었을 뿐이다. 세상이 바뀐 듯 보이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