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은…CSR이란…CSR를…CSR가…''CSR은'과 'CSR이란'에서는 R을 '알'로 읽었다. 이에 비해'CSR를'과 'CSR가' 에선 R을 '아르'로 읽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왜 영문자 R을 '아르'로 읽고 써왔을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기업 경영의 성패를 가를 필수적 개념으로 떠올랐다. CSR은 이윤 추구 활동을 넘어 기업이 지역사회 및 이해관계자들과 공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윤리적 책임의식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기업마다 앞다퉈 CSR 경영을 펼치다 보니 자연스레 관련 보도도 늘어났다. 영문자 R을 ‘아르’로 적을 근거 없어“CSR이란 흔히 사회공헌으로도 불린다.” “OOO 임직원이 주거환경개선 후원금을 전달하며 CSR를 실천했다.” “CSR가 사회적 안전장치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흔히 접하는 문구라 얼핏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예문에는 미세한 표기상 차이가 있다. 전문(前文)에 있는 것부터 보면, ‘CSR은… CSR이란… CSR를… CSR가…’로 돼 있다.토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SR은’과 ‘CSR이란’에서는 R을 ‘알’로 읽었다. 이에 비해 ‘CSR를’과 ‘CSR가’에선 R을 ‘아르’로 읽은 것이다. 앞말에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말 조사가 ‘-은/는, -이란/란, -을/를, -이/가’로 달라진다. 이런 부분은 글쓰기에서 의미가 달라질 만큼 중요 사항이 아니라고 치부돼 자칫 간과해왔지만, 실은 늘 눈에 거슬리는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언제부터, 왜 영문자 R을 ‘아르’로 읽고 써왔을까? 오랫동안 ‘아르/알’은 우리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알’로 읽는데, 규범은 ‘아르’였다는 점에서다. 더구나 그 ‘아르’가 이론적·문헌적 근거 없이 잘못 읽고 표기한 데서 출발해 관행적으로 우리말 표기의 하나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22년 국립국어원은 이 표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도대체 이 ‘아르’의 근거는 무엇일까? 아무리 문헌을 뒤져도 왜 ‘아르’로 적어야 하는지 규명할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1957년 완간된 한글학회 <큰사전>은 표제어로 ‘유에스에스알’을 올렸다. 유에스에스알(U.S.S.R)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지금은 사라진 ‘소련’을 가리키던 말이다. 우리말 최초의 대사전 격인 <큰사전>에서 당시 R을 ‘알’로 읽고 적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2022년 말 ‘알/아르’ 복수표기 인정그런데 이후 1973년 나온 한글학회 <새한글사전>을 비롯해 1980년대 이희승 <국어대사전>, 이숭녕 외 <국어대사전>은 물론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에 이르기까지 죄다 R을 ‘아르’로 다뤘다. 한국에서는 R을 ‘알’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사전에는 ‘디브이아르(DVR), 에이아르에스(ARS)’ 등으로 올라 있어 실제 언어생활과는 괴리가 있었다.
문제는 ‘R’을 ‘아르’로 적게 된 이론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영어 R의 발음은 영국식으론 [a:], 미국식으론 [a:r]다. 특히 영국영어이든 미국영어이든 어말에서 [r]이 실현되지 않는다. 가령 ‘넘버(number), 보일러(boiler), 기타(guitar)’ 등 몇 개만 살펴봐도 어말의 [r]은 한글 표기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게 확인된다.
R을 ‘아르’로 적는 유일한 근거는 외래어 표기법상 ‘국제음성기호와 한글대조표’에서 자음 앞 또는 어말의 [r]는 ‘르’로 적도록 돼 있다는 것 정도다. 또 일본에서 ‘R’을 ‘アル’([a:ru]·아루)로 읽고 적는 점이 우리 규범이 ‘아르’로 된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결국 그동안의 표기인 ‘아르’는 일본식 발음과 1970년대 이후 기존 국어사전 등에서 제시된 표기가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것으로 판단된다.
국어원은 2022년 말 R의 ‘알’ 표기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아르’를 폐기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그 결과 복수 표기를 인정하기로 했다. 당장 ‘아르’를 폐기할 경우 많은 비용과 표기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영어 단어를 고쳐 적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어지는 토씨까지 전부 바꿔야 하기에 굉장히 큰 작업이다. 물론 지금같이 압도적인 ‘알’ 발음과 표기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알’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