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디지털 경제와 결제

결제는 근본적으로 '채무를 갚는 과정'.위험과 유동성, 합의된 결제수단의 3가지 과제 충족 시 결제수단으로 활용 가능.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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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페이의 국내 상륙 소식이 뜨겁다. 삼성페이 외에는 스마트폰을 가져다대면 바로 결제가 이뤄지는 방식이 없었던 터라 아이폰 사용자들의 기대가 한층 커지고 있다. 게다가 애플페이의 국내 출시를 준비한 현대카드가 독점 계약을 포기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결제의 정의오늘날 스마트폰을 이용한 결제가 이뤄질 수 있는 근간에는 ‘결제’라는 과정이 존재한다. 결제 수단은 기술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근본은 언제나 동일하다. 먼저 결제란 채무를 이행하는 방법이다. 2만원짜리 탕수육을 주문했다면 2만원어치의 빚을 진 셈이다. 식당 문을 나서기 전 결제하는 과정은 탕수육으로 표현되는 채무를 갚는 행위다. 오늘날 대부분의 결제는 사실 돈이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2만원을 현금으로 갚았다면 나의 계좌에서 2만원이 줄어들고, 실제 중국집 주인의 계좌에 2만원이 늘어나므로 돈이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카드로 결제한다면 돈은 움직이지 않는다. 돈은 그 자리에 있고 장부에 기록된 내용만 바뀐다.

그동안 결제 기술은 몰라보게 발전했지만, 18세기 은행원이 계좌 이체를 위해 깃털 펜을 이용해 은행 원장을 수정했던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금도 마찬가지다. 실제 금을 사고팔 때 대부분은 금괴의 등록 서류를 거래하는 것일 뿐 실물 금이 오가지는 않는다. 20세기 초 세계 금 보유량의 상당 부분은 영란은행의 금고에 있었고, 그 다음은 미국 연방준비은행에 있었다. 외국 중앙은행들이 이들과 서로 금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금은 이동하지 않고, 장부에 이동 내역이 기록될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결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현금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모든 지불은 수세기 전 발명된 원장을 디지털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결제와 은행오늘날의 지불 또는 대금 결제는 돈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결국 은행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돈은 우리가 은행에 맡겨 둔 예금에서 만들어진다. 예금에서 돈이 만들어지는 기원은 중세 말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상인들은 은행에 금화 100개를 예치해뒀다. 은행은 금화를 맡으면서 상인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 금화를 맡긴 상인의 요청이 있다면 다른 상인에게 금화가 전달될 수 있도록 장부 내용을 수정할 수도 있다. 얼마 후 은행은 금화를 예금한 상인들이 100개를 한꺼번에 인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깨닫는다.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와서 맡겨놓은 금화를 돌려달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낮으므로 은행은 금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 시작했다. 은행으로부터 75개의 금화를 빌린 사람은 75개만큼의 금화를 쓸 수 있었다. 이때 실제 은행에 있는 금화는 100개뿐이지만, 쓸 수 있는 금화는 175개가 된다. 은행이 상인들이 맡겨 놓은 금화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75개의 금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오늘날 은행도 이와 같다. 누군가 은행에 예금한 돈을 다른 고객에게 대출하면서 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무분별할 경우 경제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국가에 의해 통제된다. 은행업이 엄격하게 규제되는 이유다. 결제의 근본 과제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돈을 만들어내는 능력 덕분에 은행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결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기술 발전으로 결제 방식이 달라지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기술기업이 전통적인 은행업을 대체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은행 없이 원활한 결제는 쉽지 않다. 모든 결제는 ‘가치를 이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위험과 유동성, 합의된 결제 수단이라는 과제가 내재돼 있다. 즉,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돈을 지불할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지불할 수 없으며, 서로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결제 방식이 없다면 지불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금, 카드, 수표, 계좌이체 등 그 수단이 무엇이든 간에 은행을 중심으로 안전판이 마련돼 있다. 디지털 경제에 빠르게 변모할 것만 같은 금융 분야가 스타트업이 아니라 기존 금융권 위주로 재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술 발전 덕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빌리고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놓인 결제의 근본적인 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제를 이해하기 위해 기술이 아니라 전통 금융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