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디지털 경제와 제도

시장이 없는 제도는 지속가능하지 못해. 최대한 많은 주체가 참여하는 시장을 만들어내는 고민이 규제개혁의 핵심.
[디지털 이코노미] 디지털 전환은 시장이 있어야 성공한다
많은 국제 전문가는 아프가니스탄을 제2의 한국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문제의 근원은 방만한 제도였다. 수십억 달러를 제도 개선에 투입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제도들이 ‘주입’됐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부패한 국가로 손꼽힌다. 선의의 제도와 나쁜 결과조지아 정부는 싱가포르가 되기를 꿈꿨다. 민간 산업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명분으로 세금은 줄이고 규제를 완화하는 등 힘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세계은행이 실시한 기업환경평가에서 순위도 높아졌다. 하지만 국내 경제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 하버드대의 앤드루스 교수는 조지아 정부의 조치가 기업 부담을 줄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효과적인 고용 창출과는 무관했다고 평가했다. 비슷한 사례는 인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전국 약 600개 지구의 토지 기록을 전산화할 목적으로 ‘카르나타카 사업’을 시작했다. 역시나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 등록에 걸리는 시간이 3시간에서 30분으로 줄어든 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당 사업이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줄였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토지 기록 전산화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주입’된 제도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제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참여하는 시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유의미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과정으로서의 제도아이를 낳는 것과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규제를 완화하고, 제도를 만드는 것과 유지하는 일 역시 별개의 문제다. 제도는 하나의 사건 혹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베네치아공화국의 부유한 상인들은 좋은 제도를 모두 바꿔버렸다. 경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의원은 세습제로 바꾸고, 수익성 높은 원격지 무역은 아무나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 시간이 흐르자 원격지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상인의 수는 줄었고, 번창하던 시장은 주저앉았다. 결국 베네치아의 번영은 위축되고 말았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 지역의 부는 갈수록 커졌지만, 베네치아공화국의 인구와 부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1797년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사실 베네치아공화국의 제도들은 나쁘지 않았다. 새롭게 개발된 좋은 제도가 많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된 제도는 많지 않았다. 부유한 일부 상인이 법률을 되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나라에는 유익했지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유한 일부 상인에게는 유익하지 않았던 탓이다. 제도는 문화를 반영하지만, 문화를 리드하지는 않는다. 베네치아공화국에서 문화가 일부 상인에 의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자 제도 역시 그에 맞춰 바뀌었다. 오늘날도 딱히 다르지 않다. 2017년 미국에서 로비 자금으로 지출된 금액은 무려 34억 달러다. 법률이 어느 한쪽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희생시킬 때 경쟁의 규칙은 왜곡되고 만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런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좋은 제도와 활력 넘치는 시장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무엇보다 좋은 제도는 적절한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좋은 제도를 받쳐줄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도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인구 1500만 명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900달러에 불과한 말리가 인구 6600만 명에 1인당 GDP가 4만4000달러나 되는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그대로 복제해 실행한다고 해도 그 제도가 유지될 리 없는 것과 같다. 디지털 전환 시대의 정부와 기업의 많은 제도와 전략도 마찬가지다. 어떤 국가나 기업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해도 같은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보다 먼저 많은 주체가 스스로 참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의 제도 개혁이라도 최대한 많은 주체가 참여해 시장을 창조하거나 확장해내지 못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제도가 아니라 시장에 대한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 시장이 없는 제도는 수레 뒤에 말을 매단 것과 같다. 성공적인 제도 개혁, 규제 완화 모두 고민의 초점이 제도 자체가 아니라 시장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