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적으로만 접근하면 그저 잘못 쓴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의미 일탈을 통해 고정관념이 된 전통적 문법을 깨는 순간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야만한 원색’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고, ‘서기한 광채’는 아마 ‘瑞氣한 光彩’인 모양인데 ‘서기(瑞氣)’는 명사다. 명사 밑에 ‘-한’이 붙어도 좋다면 ‘인간(人間)한’ ‘지구(地球)한’ ‘적색(赤色)한’ ‘청색(靑色)한’도 다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김동리)의미 일탈을 통해 고정관념이 된 전통적 문법을 깨는 순간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야만(野蠻)’은 ‘야만한’ 따위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서기하는 광채’는 기호지방, 특히 충청도에서 쓰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인광처럼 퍼렇게 빛나는 것을 ‘서기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서기한다’ ‘서기하는 호랑이의 눈’이라고 얼마든지 말한다.”(이어령) 이어령-김동리 대가들도 국어문법성 다퉈1959년 2월, 20대 청년 비평가로 활동하던 이어령 선생의 번역시를 두고 경향신문을 통해 지상논쟁이 벌어졌다. 우리 사회 대표적 석학이던 고(故) 이어령 선생이 젊은 시절 당대 문단의 중진인 소설가 김동리 선생과 벌인, 이른바 ‘비문논쟁’의 한 대목이다. 은유와 비문(非文) 여부를 둘러싼 내밀한 공방 속에서 수사법과 국어 문법 사이의 거친 충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의 논쟁 가운데는 특히 ‘명사+하다’ 용법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대목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말에서 ‘규범의 준수’와 ‘일탈의 유혹’ 사이에 생기는 딜레마를 살펴보자.
‘서기한 광채’에서 ‘서기’를 ‘瑞氣’로 해석한다면 어법적으로 ‘서기한’은 틀린 표현이다. ‘瑞氣’란 ‘상서로운 기운’이다. ‘기운하다’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서기하다’도 어색하다. 다만, 이어령의 설명을 보면 그가 말한 ‘서기’는 김동리가 해석한 ‘瑞氣’는 아닌 것 같다. 이어령의 ‘서기하다’는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풍기다’ 정도의 의미에 가깝다.
‘야만’은 상태명사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상태’로 풀이한다. 이치상으론 ‘-하다’를 붙여 형용사를 만들 수 있다. 다만, 현실어법에선 ‘-하다’보다 ‘-스럽다’가 붙은 ‘야만스럽다’가 단어로 자리잡았다. 그 때문인지 ‘야만하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물론 당시 이어령 선생은 수사법을 말하고 있어 ‘야만하다’의 쓰임새를 단순히 문법적 잣대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학교문법에선 규범에서 일탈한 표현으로 본다는 뜻이다. ‘검사스럽다’는 규범의 진부함 깨면서 탄생‘-스럽다’는 어떤 말 뒤에 붙어 ‘그런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하다’ 못지않게 규범과 일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새말을 만들어내 우리말 어휘군을 풍성하게 해준다. 그 원조는 ‘검사스럽다’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누리꾼은 대통령과 평검사들 간 대화의 장에 주목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거르지 않은 질문을 쏟아냈고, 급기야 대통령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라며 언성을 높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방송으로 이를 지켜보던 누리꾼은 곧바로 신조어 ‘검사스럽다’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이는 ‘논리도 없이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하며 윗사람에게 대드는 행태, 즉 싸가지 없음’을 빗댄 말이다.
‘-스럽다’는 본래 ‘어떤 특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런 특성이 좀 있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 아이한테 “너 참 어른스럽구나”라고 할 때 제격이다. 하지만 이미 어른인 사람한테는 ‘어른스럽다’고 하지 않고 ‘어른답다’라고 한다. ‘-답다’는 ‘실제로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이르러 그런 특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20여 년 전에도 검사에게 ‘검사답다’라고 하는 게 ‘규범의 언어’였다. 하지만 당시 누리꾼들은 ‘검사스럽다’를 만들었다. ‘일탈의 언어’로 새말의 지평을 연 셈이다.
이를 문법적으로만 접근하면 그저 잘못 쓴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성립하는 것은 오로지 신조어라는 점 때문이다. 의미 일탈을 통해 고정관념이 된 전통적 문법을 깨는 순간 새로운 단어가 탄생했다. 규범이란 공고한 틀에서 벗어나 틈새를 만들었고, 그 틈새가 다시 사회통념에 변형을 가져와 결국엔 새로운 형태의 말을 생성한 것이다. 이후 우리말에는 ‘부시스럽다’ ‘혜자스럽다’ 등의 신어가 잇따라 나오면서 어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