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어를 써야 할 곳에 무심코 관형어를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관형어를 남발하면 글이 늘어져 문장에 힘이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사어를 활용해야 문장에 리듬이 생기고 성분 간 연결도 긴밀해진다.
이달 초 인터넷을 달군 ‘심심한 사과’ 논란은 우리 사회의 이른바 문해력 수준을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그에 가려 미처 살피지 못한 다른 쟁점도 여럿 있었다. 문해력을 주로 어휘 차원에서 다루다 보니 자칫 통사적 측면은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말의 ‘건강한 쓰임새’를 위해서는 이 두 측면을 동시에 짚어봐야 한다. 관형어보다 부사어 많이 써야 글에 힘 있어지난호에선 ‘심심한 사과’라고 하기보다 ‘깊은 사과’라고 하는 게 좋은 까닭을 살펴봤다. 이는 어휘 측면에서 들여다본 것이다. 이를 통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더 좋은 표현이 나온다. ‘깊이 사과드립니다’가 그것이다. 관형어 대신 부사어를 써서 동사를 살려 쓰는 게 요령이다.‘심심한 사과’라고 하든 ‘깊은 사과’라고 하든 서술어로 다 ‘~말씀(을) 드립니다’가 뒤따라야 한다. 관형어 뒤엔 필수적으로 명사가 와야 해, 전체 서술부를 ‘관형어+명사+을/를+서술어’ 형태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는 문장 흐름을 늘어지게 한다. 부사어를 쓰면 동사가 살아나 바로 ‘부사어+서술어’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가령 ‘신중한 접근을 하다’ 식으로 표현하지 말고 ‘신중하게 접근하다’라고 하면 된다. ‘톡톡한 재미를 보다’라고 하는데, 이는 ‘톡톡히 재미 보다’라고 하면 충분하다. ‘각별히 신경 쓰다’를 ‘각별한 신경을 쓰다’ 식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 잘못된 글쓰기 훈련 탓이다. ‘악수하다→악수를 하다, 인사하다→인사를 하다, 진입하다→진입을 하다, 조사하다→조사를 하다’ 등 몇 개 사례만 봐도 이런 유형의 함정이 얼마나 흔한지 알 수 있다.
부사어를 써야 할 곳에 무심코 관형어를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론 문장 형식은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으므로 부사어로 쓰든 관형어 문구로 쓰든 비문만 아니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관형어 문구를 남발하면 글이 늘어져 문장에 힘이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사어를 활용해야 문장에 리듬이 생기고 성분 간 연결도 긴밀해진다.
정리하면 애초 발단이 된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는 ‘깊은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했으면 무난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하면 훨씬 간결하다. 사과 의미도 도드라져 더없이 좋다. 부사어를 살려 쓰는 게 핵심이다. ‘~뜻을 밝히다’는 의미 비트는 권위적 표현통사적 용법에서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표현은 또 있다. 앞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는 한마디로 ‘사과합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이런 유형의, 비틀어 말하는 어법을 자주 접한다.
가령 지난해 9월 한국 개신교 성장에 큰 족적을 남긴 조용기 목사가 소천했을 때 여야 정치인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았다. 언론에서도 그의 장례 일정을 앞다퉈 전했다. 당시 상투적으로 쓰이던 문구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 등 유력 정치인들도 빈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밝혔다.” 그냥 ‘애도했다’고 하면 간결하고 힘 있다. 이를 희한하게 ‘애도의 뜻을 밝혔다’ 식으로 쓴다. 문장 형태로는 중복이고 의미상으로도 잉여적이다. ‘애도했다’ ‘사과했다’고 하면 될 것을 ‘애도의 뜻을 전했다(밝혔다)’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식으로 비틀어 쓰는 것이다.
문맥상으로도 어색하다. 문상객은 빈소에서 당연히 고인을 ‘애도하는’ 것인데, 이를 ‘애도의 뜻을 밝힌다’고 하면 애도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뜻’은 직접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런 속내가 있음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행위자의 의도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일종의 정치적 화법이라는 점에서 권위적 표현의 잔재이기도 하다. ‘감사(사과/유감)의 뜻을 표하다(전하다/밝히다)’ 식으로 비틀지 말고, 바로 ‘감사해했다/사과했다/유감스러워했다’라고 써보자. 그래야 우리말이 간결해지고 뜻도 명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