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디지털 경제와 제도

성장은 기술과 제도의 융합으로 가능.
시장과 정부의 방향성 있는 혁신 추구로 성공적인 디지털전환 가능.
Getty Imgea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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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경제 성장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다. 바퀴와 인쇄술, 나침반과 같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발명품은 많았지만, 산업혁명 이전의 발명은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성장의 시작이 유럽의 작은 나라 영국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오랜 기간 인류의 혁신을 선도했던 나라는 대국인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덫과 기술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저성장 시대를 설명한 학자는 토머스 멜서스다. 그는 토지가 한정적인 탓에 인구가 증가하면 1인당 총생산이 필연적으로 감소한다고 주장했다. ‘멜서스의 덫’은 기술 발전이 결코 1인당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1인당 생산성이 높아져 생활수준이 개선되면 반드시 인구가 증가하고, 이는 다시 1인당 생산성을 낮춘다는 논리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부터 멜서스의 덫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흔한 설명은 기술학적 근거다. 농업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생산성의 원천이 한정된 토지에서 벗어나 축적 가능한 자본으로 옮겨가면서 생산성 증가가 인구 증가 속도보다 빨라졌다는 설명이다. 인구 규모를 바탕으로 한 설명도 있다. 인구 규모의 확대는 시장의 확장을 의미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많아져 총생산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으로 인구가 폭증하면 1인당 총생산은 다시 낮아진다. 여기서 ‘인구구조의 전환 이슈’가 개입한다. 산업혁명 이후의 생산성은 첨단기술에 의해 견인됐으므로,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나라일수록 자녀들이 신기술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를 적게 낳고, 아이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제도와 성장명쾌한 설명이지만, 문제는 산업혁명 시기 영국에서는 인구 증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산업혁명 직전 10년간 인구가 3.2배나 증가한 중국에서는 경제 성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술 요소가 성장을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경제사학자인 조엘 모키르는 그의 책 <성장의 문화>를 통해 제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먼저 기술과 이론을 구분한다.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기술은 존재했지만, 이론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왜 작동하는가’로 초점이 달라지자 다양한 융합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기술의 동반 진화하자 사회에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경제학자 필리프 아기옹은 그의 책 <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산업혁명의 주인공이 영국이었던 원인을 과학과 기술의 다양한 융합을 제도가 보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술 자체는 프랑스가 앞선 영역이 많았다. 하지만 지식재산권 보호는 영국이 월등히 앞섰다. 17세기 후반의 명예혁명으로 영국 의회는 왕보다 강한 권리를 확보한 덕분에 어떤 정치적 개입에도 지식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 발명가에게 14년간 상업활동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특허는 무려 17세기 초부터 등장했다.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150년 넘게 앞선 제도였다. 15세기 베네치아공국의 무라노 유리 기술은 세계 최고였던 탓에 무라노섬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섬을 절대 떠날 수 없었다. 특허권 보장이 없었다면 축적된 기술에 대한 지식을 길드 조직이 관리하던 행태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술과 제도의 콜라보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결국 성장은 기술과 제도의 융합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혁신이 사회에 축적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제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지식재산권을 보장하고, 믿고 돈을 빌려주고 빌릴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될 때 혁신을 장려하고, 성장의 촉매제로 활용할 수 있다. 결국 디지털 전환도 기술만의 이슈가 아니라는 의미다. 기존 제도는 재점검하고, 없는 제도는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주체에 대한 설득과 대안 마련도 필수다. 더 이상 시장경제의 활성화가 정부 역할 축소와 동의어가 아닌 이유다. 기업과 정부 모두 방향 있는 혁신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