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삼마태수 (三馬太守)
▶한자풀이
: 석 삼
: 말 마
: 클 태
: 지킬 수

세 마리의 말만 타고 오는 수령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백리를 이름
-조선시대 송흠(宋欽)의 고사

송흠(宋欽)은 조선 성종 때 외교문서를 담당한 승문원에서 일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중종반정으로 복직해 홍문관 박사 등의 관직에 올랐다. 특히 그는 1528년 담양부사가 된 뒤 장흥부사, 전주부윤, 전라도 관찰사 등 지방의 외직(外職)에 여러 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는 역마(驛馬)의 수를 관직에 따라 법으로 정해 놓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부사(府使: 지방 장관직)는 부임이나 전임 시 짐을 운반하는 태마(駄馬) 한 필을 포함해 세 필의 말을 쓰고, 수행원을 위해 네 필의 말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 지방관은 7~8필의 말을 데리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고 전임했다.

하지만 송흠은 늘 세 필의 말만으로 검소하게 행차하고 짐도 단출했다. 지극한 효성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백성들은 그를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삼마태수는 ‘세 마리의 말만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를 이른다. 맑고 흰 벼슬아치를 이르는 청백리(淸白吏)도 뜻이 같다.

《고려사(高麗史)》에도 비슷한 고사가 전해진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현재의 순천)의 부사로 있던 최석(崔碩)이 비서랑이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말을 바치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 청했다. 최석이 웃으며 사양했다. “말은 경도(京都)에만 이를 수 있으면 될 것을 골라서 무엇하겠느냐” 하고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말을 받지 않자 망아지까지 돌려주며 말했다. “그대들의 고을에서 말이 낳은 망아지를 데리고 온 것도 나의 탐욕이다. 그대들이 지금 말을 되돌려받지 않는 것은 내가 탐을 내면서도 겉으로만 사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작가/시인
'인문 고사성어' 저자
작가/시인 '인문 고사성어' 저자
이 일로 마을에서 말을 바치는 폐단이 없어졌으며, 승평부 사람들은 팔마비(八馬碑)를 세우고 그의 덕을 칭송했다.